국민이 주주인 ‘제5의 정유사’를 표방하고 있는 국민석유주식회사 설립준비위원회는 약정 공모액이 320억원을 넘어섰다고 23일 밝혔다. 기름값 20% 인하를 내세우며 출범한 지 한 달 여 만이다.

차량 소유자 1600만명을 겨냥한 1인 1주(1만원) 갖기 운동이 ‘착한 기름값’에 대한 소비자 기대심리를 파고들며 적지 않은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유업계를 비롯한 다른 한편에서는 실현 가능성보다는 대통령 선거 정국에 편승한 ‘솔깃한 허상’일 뿐이라고 일축, 국민석유회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이태복 국민석유회사 설립준비위 상임대표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사업자조합과 신용조합, 법인 등의 참여도 유도해 다음달 중 500억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한다”며 “생각보다 빨리 진행돼 약정 목표액을 1000억원으로 늘리고 설립 자금도 3000억원으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국민석유회사는 인터넷을 통한 주주 모집으로 500억원이 모이면 발기인 총회를 갖고 설립 허가를 신청할 계획이다. 자본금이 1000억원을 넘어서면 회사 설립을 선언하고 약정액 납입을 추진할 예정이다. 김재실 전 산은캐피탈 사장과 김상집 5대 거품빼기범국민운동광주본부 상임대표가 설립준비위 공동대표를, 이윤구 전 적십자사 총재가 고문을 맡고 있다.

설립 준비위 측은 “약정에 참여한 사람 수는 공개할 수 없지만 1주에서 10주 사이의 소액주주가 70% 이상”이라고 말했다. 대주주의 지배를 배제하기 위해 1인 소유 한도를 3% 이내로 제한하고 100주 이상을 약정하면 연락해 실제 투자 의사를 확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국민석유의 구상은 현실적인 검토 없이 일단 내놓고 보는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공약과 같다고 평가하고 있다. 약정액이 1000억원에 못 미치거나 약정한 대로 납입이 이뤄지지 않으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한다. 정유업계 고위 관계자는 “정치권의 기업 때리기 경쟁에 편승해 고유가에 시달리는 국민적 정서를 악용한 아이디어”라며 “매일 수십종의 원유를 살펴보며 경제성을 검토하는데 저유황유를 싸게 들여올 수 있으면 정유사들이 왜 진작 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1000억으로 정유사 세운다니…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1000억원으로 제대로 된 정제시설을 갖출 수 없고 △캐나다와 시베리아에서 저유황유를 들여오는 비용이 더 비싸며 △정유공장이 들어설 부지도 마땅치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자본금 1000억원’의 현실성에 대해 국민석유는 SK도 하루 3만5000배럴의 정제시설을 수백억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했고 정부 정책자금을 받아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자본금이 모인 후 저리의 정책자금을 요구할 것이고 국민연금의 투자를 요청할 수도 있다고 했다. 국민석유는 하루 10만배럴짜리 정유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국내 정유 4사가 하루에 정제하는 294만배럴의 3.4% 수준이다.

이에 대해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대한석유공사가 미국 걸프(GULF)와 합작으로 정유사업을 시작한 것은 1962년으로 벌써 50년 전”이라며 “이후 걸프가 10년, 정부가 10년간 맡아 기술과 운영 노하우를 익혔다”고 반박했다. SK이노베이션의 울산콤플렉스에서는 하루 원유 84만배럴을 정제하고 있다. 이문배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10만배럴 정도면 대규모 유조선을 못 쓴다”며 “정유산업은 장치산업인 만큼 규모의 경제를 갖춰야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국민석유는 중동의 고유황 중질유를 주로 들여오는 기존 정유 4사와 달리 캐나다, 시베리아의 저유황유를 들여와 정제비용을 줄인다는 구상이다. 기존 정유 4사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쿠웨이트 카타르 등에서 84%의 원유를 들여오고 있다.

문제는 이를 통해 20% 싼 기름 공급이 가능하냐는 점이다. 정유업계는 캐나다는 원유를 수출할 수 있는 수송관이 없고 시베리아는 공급이 불안정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원유를 수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성과 공급 안정성이기 때문이다.

이 선임연구원은 “기존 정유사들과 같은 고도화설비는 필요 없더라도 값싼 고유황 중질유를 들여와서 황을 제거하는 기존 정유사보다 더 싸게 제품을 공급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수입선 다변화와 더불어 필터 교체를 통한 원가 절감과 정부의 유류세 인하가 병행되면 충분히 20% 기름값 인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충분한 자금이 있다고 해도 정유공장 부지를 선정하고 허가를 받는 것은 쉽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국민석유 측은 “몇 곳 지자체에서 부지 관련 연락이 와서 기술소위에서 검토 중”이라면서도 “어디인지는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정유공장은 입지가 까다롭다. 유조선이 정박할 수 있는 부두와 정제, 탈황시설 원유, 제품 탱크, 재처리 설비들까지 들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정유업계는 정유공장을 지으려면 2조원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주민 동의를 얻고 환경 영향 평가 등을 거치는 데 2년 이상 걸릴 것”이라며 “허가가 난다 해도 공장을 짓는 데만 다시 1~2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정현/정성택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