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회를 말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용어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경제의 우경화, 정치의 좌경화’란 자기파괴적 언어조합이다. 생뚱맞은 조합은 한국에도 있다.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다. 시장의 근간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다. 권리와 의무를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다는 민주화와는 논리적 연결성이 떨어진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나 ‘경제 민주화’ 모두 아래는 한복, 위에는 양복을 입은 듯 어울리지 않는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기발한 생각을 해낸 사람은 덩샤오핑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인정한 공산주의자였다. 최빈국 공산중국을 30년 만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킨 개혁·개방노선의 설계자다. 덩샤오핑의 눈에 한국의 경제 민주화는 어떻게 비쳐질까. ‘한국의 생산력이 그 정도로 높아졌느냐’고 먼저 놀랄 것 같다. 성장우선주의에 반기를 든 사람들을 그는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으로 굴복시켰다. 진짜 사회주의를 하려면 먼저 국가 전체의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술 자본 노동력 등 각 방면에서 풍부한 유·무형의 자산을 확보해야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먹고 살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0년동안 성장만 추구해라"

창고에 쌓아둔 돈에 곰팡이가 피었다며 100위안짜리 지폐를 온 동네에 널어놓고 말린 안휘성의 거부 녠광주도 그래서 그에겐 중요했다. 지나친 돈자랑과 허세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그를 처벌하자는 여론이 높아졌을 때 덩샤오핑은 “잡아넣으면 뭐가 달라질 수 있느냐”고 반문했을 뿐이다. 씨앗사업으로 돈 잘 버는 사람에게 괜한 시비를 하지 말고 앞으로 100년간 생산력 향상에만 온 힘을 쏟으라고 질책했다. 그런 덩샤오핑의 눈에 비친 한국의 경제 민주화란 구호는 허구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유토피아를 건설할 사회적 생산능력이 여전히 초급을 막 넘어선 단계라고 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말이다.

게다가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덩샤오핑이다. 경제 민주화란 용어엔 경제의 기본원리인 시장의 규칙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대형마트의 휴일영업 금지 같은 변칙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재래시장을 살리자고 한 일이지만 대형마트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실직하고, 납품업체들의 매출이 감소하는 역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결코 ‘행복한 결과’와는 거리가 멀다.

진실이 아닌 허위가 지배

덩샤오핑의 이념은 사상해방과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요약된다. 공산혁명가이지만 마오쩌둥의 집단생산체제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어진 것들에 대한 교조적 믿음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의 답을 현실에서, 실천이 가능한 것에서 찾는 실용주의자다운 생각이다. 덩샤오핑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사회 일각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존재한다. 경제 민주화가 자본가와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도 그렇다. 경제를 선악문제로 본다면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이해는 불가능하다. 광우병 파동에서도 그랬듯이 잘못된 믿음이 집단화돼 나타났던 섬뜩한 광기가 가졌던 파괴본능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도 하나같이 경제 민주화란 말에 집착한다. 그래서 대기업은 무조건 두들겨 패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듯하다. 공통의 이익을 추구할 파트너는 절대 아닌 것처럼 몰아붙인다. 덩샤오핑이 한국의 경제 민주화에 대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성장을 도외시하는 데다 잘못된 생각의 틀에 갇혀 있는 한국에선 애당초 틀린 이야기야”라는-.

조주현 논설위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