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만난 기업인 출신의 한 초선 국회의원은 “19대 국회에 입성해 놀란 점이 세 가지”라고 했다. 첫째가 정당의 단순함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선거와 표에 도움이 된다면 당의 정체성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한 이슈에 천착하는 데 놀랐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지(無知)’다. 새누리당이 경제 민주화 관련 법안 중 가장 먼저 낸 것이 재벌 총수의 횡령·배임에 대한 집행유예 금지법안이다. 그는 “배임과 횡령을 싸잡아서 똑같이 처벌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임은 임무를 저버려 회사나 정부기관 등 조직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다. 횡령은 돈을 빼돌리는 것이다. 기업인들의 횡령 행위와 경영적 판단에 따른 실패를 똑같은 잣대로 처벌하자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국회의원 수준이 이런데도 매번 그 중 절반은 다시 선출되는 게 세 번째로 놀랄 만한 일”이라며 웃었다.

'재벌때리기' 는 부작용만 초래

자리를 파한 뒤 곰곰이 곱씹을 대목이 많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제 민주화 논쟁이 뜨겁지만, 경제를 민주화한다는 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관련 법안들이 쏟아지고 있어서다. 기초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으려는 꼴이다.

결과는 보는 대로다. 배임과 횡령도 구분하지 않은 대기업 총수 집행유예 금지법안이 버젓이 국회에 제출되고, 경제 민주화라는 명분 아래 순환출자 금지와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심지어는 재벌 해체론까지 나오고 있다. 한 기업인은 “정치민주화로 ‘6·29 선언’을 이끌어낸 것처럼, 경제분야에서도 재벌들을 타도해 백기투항하도록 만들자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경제 민주화 논쟁의 수혜대상이 돼야 할 중소기업인과 소상공인, 벤처기업인들조차 ‘이건 아니다’며 손사래를 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에서 ‘재벌세 신설’을 제안했을 때 그랬고, 새누리당에서 나오고 있는 대기업 총수 집행유예 금지나 사면권 제한, 순환출자 금지 등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 중소기업인은 순환출자금지 방안에 대해 “중소기업인들이 원하는 것은 재벌의 골목상권 침탈을 막아달라는 것이지, 재벌의 지배구조 전체를 흔들자는 것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한마디로 과유불급(過猶不及),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지적이다.

불공정거래 개선 등이 먼저

경제 민주화가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의 정리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김 회장은 최근 제주도에서 가진 소속 단체장들과의 모임에서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이 원하는 경제 민주화란 3불(不) 문제의 개선”이라고 강조했다. 중소기업을 위한다며 이런저런 새로운 얘기를 꺼내지 말고, 이미 요구한 3불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 달라는 주문이다. 3불이란 대기업의 일방적인 납품단가 책정 등 거래의 불공정, 대기업의 무분별한 진출로 인한 시장 불균형, 카드수수료 차별 등 제도의 불합리를 뜻한다. 이를 해소하는 경제 민주화 논쟁에는 찬성하지만, 그를 넘어서 ‘대기업 때리기’로 나간다면 반대한다는 메시지다.

대선이 5개월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각 후보 캠프에서는 경제 민주화라는 명분 아래 더 세고, 더 강력한 재벌정책들을 내놓을 것이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중소기업을 위한다며 지금처럼 뭉뚝한 도끼를 휘두르면 옆에 있는 중소기업까지 다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수진 중기과학부 차장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