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보호주의'에 우는 한국청년
세계 각국에 ‘일자리 보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고용부진이 심각한 과제로 등장하자 자국민 일자리 지키기에 나선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 인턴으로 일하려던 한국 청년의 비자신청이 거부되고, KOTRA 싱가포르 무역관에서 인턴교육을 받던 대학생들이 싱가포르 정부당국으로부터 까다로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지난 23일 오후 1시, 싱가포르의 금융 및 업무중심지인 선텍시티에 있는 KOTRA 싱가포르 해외무역관에 싱가포르 노동청(MOM) 조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관광비자로 입국해 무역관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 대학생 7명에게 동행조사를 요구했다. KOTRA 직원들이 막아섰지만 이들은 “비자문제다”는 말만 남기고 학생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윤희로 지역본부장이 곧바로 싱가포르 노동청을 찾아갔다. 그는 “학생들은 영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 산업현장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두 시간 동안 상세히 설명했지만 학생들은 10시간 조사를 받은 뒤 자정이 돼서야 겨우 풀려났다. 여권도 압수당했다.

KOTRA 측은 무역관 주변의 싱가포르인들이 무역관에 한국 학생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들 일자리를 침해하려는 것으로 여겨 노동청에 신고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KOTRA 측은 “싱가포르 노동청이 경제위기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예민해진 상황에서 무역관이 공공기관인 줄 모르고 조사를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숙명여대 경제학부 이모씨(21)는 ‘글로벌 일자리 보호주의’에 우는 한국 청년의 또 다른 사례다. 그는 지난 5월 미국의 한 유통회사 인턴자격을 얻기 위해 서류 전형과 두 번에 걸친 영어 면접까지 어렵게 통과했다. 이씨는 그간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비자를 발급받는 대로 출국해서 다음달부터 미국에서 일할 예정이었다.

'일자리 보호주의'에 우는 한국청년
하지만 합격의 기쁨도 잠시, 이달 초 미 대사관에 비자 발급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씨는 “(미국 영사가 비자 발급 인터뷰에서)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짐을 나르는 작업도 있는 유통회사에서 일하기엔 어려워 보인다”고 했던 심사관의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심사관은 “전공이 경제학인데 유통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재정 보증 서류도 완벽히 구비해 비자 발급을 받는 데 문제가 없었다”며 “지난 석 달 동안 서류 준비 등을 위해 쓴 돈만 500만원에 달하는 데 화가 난다”고 억울해했다.

이씨처럼 미 대사관에서 인턴 비자 발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지난해 12월부터 급격히 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취재팀이 서울의 20개 비자 대행업체와 유학원을 취재한 결과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 비자대행 업체 인트락스의 크리스 안 한국지사장은 “해외 인턴십을 위한 J1 비자의 발급률이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90%대였는데 지난해 말부터는 50%대로 떨어졌다”며 “비자 인터뷰를 여러 차례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 한 번에 비자를 발급받을 확률은 절반도 안 된다”고 말했다.

비자대행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미국 내 청년 실업률은 높아지는데 외국인이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는 상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2004년부터 시행한 일자리와 여행을 함께하는 프로그램인 ‘워크 앤드 트래블(work and travel)’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 가운데 불법 체류자가 많은 것을 보고 미 국무부에서 각 국가의 대사관들에 비자 발급을 제한하라는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에서 억류된 대학생들도 KOTRA와 대학들이 맺은 협약에 따라 ‘정상적으로’ 현지를 방문했다. 학점인정으로 1학기(6개월)를 일하거나 방학(2개월) 동안 무역관에서 시장조사, 전시회 작업 지원 등의 업무를 해온 한국외국어대 경희대 등의 학생들이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 나라마다 자국 내 일자리를 보호하려는 ‘잡 쇼비니즘(chauvinism·맹목적 애국주의)’이 꿈틀대는 것이다. 이들 대학생처럼 최근 해외 인턴십을 준비하는 대학생이나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는 직장인들이 늘지만 곳곳에서 비자 발급을 거부당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자국민 일자리를 보호하려는 ‘일자리 보호주의’가 확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기류는 세계 경제 침체와 맞물려 한층 심해질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김우섭/박상익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