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와 이순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15세기 이탈리아 탐험가였던 콜럼버스는 1492년 카스티야 왕국(후에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 1세 후원을 받으며 대서양 항해를 떠났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은 후세 사람들의 표현이고, 그가 인도를 찾아 떠난 이유는 육로인 실크로드 대신 대서양을 가로질러 황금과 향신료 등을 보다 값싸게 얻기 위해서였다.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출항한 이후 네 차례에 걸친 항해를 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 혹은 아시아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믿었다. 콜럼버스는 생전에 신대륙 발견자로 대접받지 못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 수난을 겪었고, 미치광이로 취급받다가 쓸쓸하게 죽어갔다.

한편 조선시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거북선을 제작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옥포 적진포 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격파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을 때는 명량해전에서 13척의 배로 일본의 130여척과 싸워 대승을 거뒀다. 1598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콜럼버스와 이순신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이 남긴 항해일기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자임을 다시 바로 잡은 사람은 콜럼버스의 아들 페르난도이다. 콜럼버스는 1492년 8월3일부터 1493년 3월15일까지 항해일기를 썼고 이를 이사벨 여왕에게 바쳤다. 페르난도는 남은 일기들을 연구하면서 아버지가 ‘아메리카(당시 신대륙 발견자라고 알려졌던 아메리고 베스푸치에서 나온 이름)’에 도달하는 최단 경로를 찾아 대서양을 가로질렀고, 유럽인들이 전혀 모르는 ‘신세계’를 소개했다는 것을 밝혔다. 페르난도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현재 스페인의 세비아 성당에 유해가 묻혀 있다.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을 시작으로 그해 5월1일부터 1598년 10월7일까지의 전쟁 상황을 일기로 기록했다. 전쟁 상황과 병법, 모(母)와 아들에 대한 걱정, 전쟁을 맞은 인간 이순신의 외로움과 고투가 담겨 있는 비망록이다. 치열한 전투 중에도 초서로 흘려 쓴 글씨가 어김없이 기록돼 있다. 어떤 제목도 붙어 있지 않았으나, 정조 19년(1795)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속에 넣어 편찬하면서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게 됐고, 역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남게 됐다.

콜럼버스와 이순신의 일기는 그들을 역사 속에 우뚝 세웠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땅을 에스파냐의 왕과 여왕의 것이라고 선포했고 이로써 가혹한 식민지 시대의 막을 열기도 했다. 서구인들이 ‘신대륙’이라고 칭한 그곳은 사실 몇 천 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살던 오래된 땅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1592년 이순신이 투옥된 것이 원균의 모함 때문이라고 단순하게만 알고 있다. 원칙만을 고수했던 이순신과 술과 타협을 좋아했던 원균 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기를 잘 살펴보면 전쟁과 정치적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몰았음을 알 수 있다. 원균도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쟁터에서 희생된 우리나라의 한 장수였다. 원균도 당시 정황을 일기로 남겼다면 지금처럼 ‘나쁜 장수’로만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일기 숙제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는 부모들을 만났다. 뜬금없이 콜럼버스와 이순신의 공통점을 들고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일기는 한 개인의 역사지만, 나아가 한 나라나 세계 역사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콜럼버스와 이순신 같은 역사적 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개인도 마찬가지다. 안네 프랑크라는 열세 살의 폴란드 소녀는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사심 없이 자신의 감정과 생활을 기록함으로써 세계사의 뒤틀린 이면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일기는 어른들도 써야 할 삶의 자발적인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김다은 < 소설가 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