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잡지 발간이 자유롭지 않던 1984년, 열네 명의 신인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시선집 ‘시여 무기여’가 나왔다. 제목이 시사하듯 독재에 저항하는 무기로서의 시가 요구되던 때였다. 고재종, 김해화 시인의 등단지면이기도 했던 이 시선집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대명사인 실천문학사 ‘실천시선’의 첫 번째 작품이란 점이다.

실천시선이 28년 만에 200호를 맞았다. 실천문학사는 기념시선집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를 펴냈다. 28년간 한국 리얼리즘 시가 걸어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은 신경림 김지하 김남주 이재무 도종환 손택수 등의 면면에서 보듯 한국 현대시사의 큰 줄기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여 무기여’ 이후에도 초기에는 주로 시선집이 기획됐다. 옥중시 저항시 노동시 농민시 교육시 등 주제별 선집이나 반시 목요시 자유시 삶의문학 등 동인별 선집이 간행됐고 팔레스티나 민족시집, 아프리카 민요시집, 폴란드 시집 등 제3세계에 대한 유대와 관심을 나타내는 시집들도 나왔다.

이후 개인시집 중심으로 바뀌면서 199호인 고형렬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가 나올 때까지 모두 128명의 시인이 실천시선을 통해 시집을 내놓았다.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 양성우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강은교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김남주의 ‘나의 칼 나의 피’, 김지하의 ‘애린’, 허수경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등이 모두 실천시선으로 나왔다.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은 100만부 이상 팔렸으며 현재까지 쇄를 거듭해 사랑받고 있기도 하다.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에는 오랫동안 실천시선 기획위원으로 활동한 문학평론가 최두석, 박수연이 뽑은 128편의 작품이 시대순으로 수록됐다. 1980~1990년대 민중·노동·참여시의 변모 양상,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등 시대 상황에 따른 리얼리즘 시의 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씨는 “세상이 달라지고 시를 움직이는 언어의 동력도 무섭게 변했으나 이 200호를 관통하는 부동의 문학적 핵심이 있다”며 “‘오 평등 오 자유 거리에 있다’ 이 한 구절에 농축된 저항의 정신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