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거리. (…) 이 땅의 냉한지대와는 아랑곳없이 명동의 하루는 낮이면 낮대로, 밤이면 밤대로 온갖 사치와 유행과 오락과 술과 여자로 그칠 사이 없는 소란 속에 그래도 한국 최고의 호사로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55년 전 한 신문 기사에 묘사된 서울 명동의 하루 풍경은 요즘의 명동과 별반 다름이 없다. 전국 최고의 상권이라거나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명동은 여전히 소비문화의 중심지요, 서울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명동의 공간성(空間性)은 언제 어떻게 형성됐을까.

여성학자 김미선 씨는 최근 펴낸 《명동 아가씨》에서 “소비문화 중심으로서의 명동은 이미 1950~1960년대에 만들어졌다”며 “그 중심에 여성이 있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당시 ‘명동 백작’이라 불린 소설가 이봉구의 시선에 포착된 남성 중심의 데카당과 낭만의 거리로서의 명동이 아닌 ‘여성에 의해 성별화된 소비·노동·문화 공간으로서의 명동’을 조명한다. 당대를 경험한 명동 사람 개개인의 시대 체험을 벽돌 삼아 쌓아 올린 ‘여성의 명동사’가 촘촘하다.

지금의 명동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본정통(本町通)의 배후로 발전했다. 현재의 충무로 1, 2가 일대를 가리키는 본정통과 나란한 명동 1, 2가 일대의 명치정(明治町)이다. 조선시대까지 가난한 양반이 살던 이곳은 본정통의 상권을 뒷받침하는 먹자골목 또는 유흥거리로 발전했다. 야노 다테키가 1936년에 쓴 《신판 대경성 안내》에는 ‘명치정 1정목은 큰길 쪽은 소매점가, 골목 일대는 카페, 끽다점, 오뎅 가게, 지나 요리, 식당 옥돌 등이 있는 향락지’라고 적혀 있다.

명치정과 본정 일대가 ‘명동’이란 이름으로 부각된 것은 1950~1960년대다. 전후 재건사업이 진행되면서 명동은 식민지 시기 본정통의 공간성을 넘겨받았다. 양장점과 미장원을 비롯해 최신 유행을 이끄는 소비공간이 명동 일대에 ‘산불 끝에 돋아나는 고사리순같이’ 들어섰다.

한 양장점을 시작으로 국제 양장사, 송옥 양장점이 문을 열었고, 허바허바 백난 스왕 등의 미장원이 경쟁했다. 양재학원, 미용학원, 기술학교 등 이들 가게에 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학원도 생겼다. 양복점과 귀금속상이 많은 종로 등지와 달리 여성의 생활 중심지가 된 것.

저자는 명동이 활기를 찾게 된 데에는 다방의 역할도 컸다고 한다. 다방은 ‘모리배, 부로카, 협잡배의 사무소로, 문화인들의 연락 장소로, 집없는 룸펜들의 편안치 않은 안식처로’ 북적거렸다. 사무실을 내지 못했거나 잘 곳이 없는 사람들도 다방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사보이호텔, 오양빌딩, 가톨릭 여학생회관, 성모병원, 유네스코 회관, YWCA 건물이 들어섰다. 보건사회부, 내무부 등의 정부 부처와 대한증권거래소, 은행 본점도 명동과 을지로에 둥지를 틀었다. 미도파 백화점(롯데 영플라자), 동화백화점(신세계 백화점)을 포함한 백화점도 다시 문을 열었다.

여성들은 이런 명동을 찾아 소비했고 생활했다. 백화점은 여성들의 ‘제2의 집’이 됐고, 소비는 여성의 역할이 됐다. 미장원에서 고데를 하고 ‘신식 서양여자가 돼’ 나온 여성들은 양장점에서 맞춘 옷을 갖춰 입고 여성 국극을 보며 유행을 따랐다. 엄앵란 김지미 도금봉 최은희 같은 여배우들은 단골 미용실을 두고 드나들었다. 각종 여성잡지들은 이런 유행을 안내하고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김남조 시인은 “여성의 화장은 본능”이며 “여성은 최대 한도까지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지만, 여성의 소비는 사치와 허영일 뿐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명동은 ‘일하는 여성’의 세계이기도 했다. 양장점과 미용실이 모여 있는 명동은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었다. “가부장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와 그 질서에 겁박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한 공간이었다는 의미다.

저자는 “명동은 여성들이 소비라는 행위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을 형성하고 새로운 자신을 보여준 무대와도 같은 곳”이었다며 “여성은 소비문화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명동이란 지역의 공간성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주인공이었다”고 말했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