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특허괴물’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 회사가 최대주주인 록스타비드코가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등 한국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통신 비표준 특허를 침해했다”며 특허료를 달라고 요구했다. 애플 중심의 컨소시엄이 파산한 통신장비기업 노텔을 인수했을 때 이미 알아봤다. 당시 구글이 제시한 9억달러의 무려 5배인 45억달러를 제시할 만큼 이들은 노텔 특허 6000여건에 집착했다.

두 얼굴의 애플

[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한국판 '특허괴물' 소동
삼성-애플 간 본격적 소송국면에서 애플이 디자인을 넘어 통신특허 침해를 제기한게 예사롭지 않다. 더 주목되는건 애플의 변신이다. 제조사와, 제조는 하지 않고 소송만 일삼는 특허괴물 간 구분 자체가 모호해져 버렸다. 기업의 또 다른 진화를 예고하는지도 모르겠다.

특허괴물의 국내 기업 공격이 갈수록 거세지는 양상이다.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등이 세계 양대 특허괴물 인텔렉추얼벤처스(IV)와 인터디지털에 뜯긴 3세대 이동통신 로열티만 지난 6년간 1조3000억원에 달한다. 특허괴물의 소송에 시달리는 건 애플도 마찬가지였다. 모바일 회사로 탈바꿈했어도 정작 통신 등 특허 포트폴리오는 취약했던 애플이다. 그런 애플이 특허를 보강하더니 특허괴물이라는 또 다른 얼굴로 곧바로 공세에 나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 가능한 해법이다. 공격을 하든 방어를 하든 제조사 스스로 제조와 특허괴물의 두 얼굴을 갖든가, 아니면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기업들과 연합해 별도 특허괴물을 만들어 대응에 나서는 것이다. 어차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특허괴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특허괴물에 대한 피해 의식이나 부정적 시각을 아예 떨쳐 버리고 정면대결을 선택하는 게 훨씬 나을 수 있다. 실제로 특허괴물에는 특허괴물로 맞서야 한다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결국 대기업들은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판 특허괴물이 있기는 하다. 무슨 일만 터지면 기구부터 설립하는 우리 정부가 가만 있을리 없다. 이명박 정부는 해외 특허괴물 공세에 맞서 국내 기업을 보호하는 이른바 ‘백기사’를 맡겠다며 인텔렉추얼디스커버리(ID)를 만들었다. 명분은 그럴싸하다. 이름에서부터 해외 특허괴물 인텔렉추얼벤처스를 염두에 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민·관 합동으로 5년간 5000억원 규모(정부 2000억원, 민간 3000억원)의 지식재산관리회사로 키우겠다는 게 정부 목표다. 출범 당시 몇몇 대기업들을 억지로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올해 정부 예산만 333억원이 들어갔다. 소송 등 분쟁 가능성 등을 고려해 특허 매집에 나선다고 한다.

그러나 인텔렉추얼디스커버리가 백기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관제 특허괴물이 전 세계에 사무소를 두고 특허를 매집하는,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움직이는 인텔렉추얼벤처스를 당해낼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다.

관제 특허괴물로 대항?

[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한국판 '특허괴물' 소동
기업 간 특허소송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건 위험하다. 국내 기업 대 외국 기업, 국가 대 국가로 접근하는 건 더욱 그렇다. 당장 외국 기업에 특허를 팔 경우 매국노로 몰리는 그런 분위기라면 특허거래나 가치평가부터 제대로 되기 어렵다. 관제 특허괴물로 외국 기업을 공격하다 국가 간 쟁점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무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로서는 득보다 실이 훨씬 클지 모른다. 정부가 아닌 민간이 주도하는 토종 특허괴물들이 나와야 한다. 정부는 특허거래를 활성화하고, 기업 간 인수·합병(M&A)을 촉진하고,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일만 잘해도 충분하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