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입대를 두 번씩이나 배웅하는 여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런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처녀 시절 나의 입대를 두 번씩이나 배웅하며 눈물을 흘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한 달 뒤인 1980년 6월, 아내는 논산훈련소로 입소하는 나를 배웅했다. 대학가 데모가 한창이던 당시 훈련소는 대학생 출신 훈련병들에게 유독 혹독했다. 내 아내도 그런 소문을 들었던지라 논산훈련소 정문 앞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내가 힘겨운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배치를 받은 곳은 국군보안사령부. 당시 ‘끗발’로 치자면 최고의 부대였다. 보안사에 들어가자마자 봤던 상관의 관등성명이 ‘소장 전두환’이었던 것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이름 앞의 계급이 2개월 남짓 만에 ‘중장’에서 ‘대장’으로, 그리곤 대통령으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그곳에서의 군 생활은 길지 않았다.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아 행정상의 이유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일단 집에 머무르다 전방에 있는 보충대로 찾아가 다시 배치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아내는 결국 전방사단으로 입소하는 나를 부대 앞까지 또다시 따라와 애인의 입대를 두 번 경험하는 ‘불운의 여인’이 됐다.

보안사에서 최전방부대로, 말 그대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옮겨가며 군생활을 했지만, 그래도 그 두 곳에서의 상반된 군생활은 내게 커다란 인생의 교훈을 안겨줬다. 서로 간의 배려와 이를 통한 화합이 어떠한 가치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예컨대 대학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생 서로 간에 동질감이 있고, 그들과 의기를 투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군대에 모인 사람들은 달랐다. 내가 먼저 희생하고 진심으로 배려하지 않는다면 명령에 의한 위계질서가 아닌 진정한 화합을 이끌어내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군대생활을 통해 서로를 배려함으로써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 간의 화합, 즉 인화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았다. 이는 내가 25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며 다양한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면서, 남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이끌어냈던 성공 키워드가 됐다고 생각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조직의 화합을 이끌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수혜를 보게 된다. 이는 조직의 리더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말단 직원에서 사장에 이르기까지 조직 화합을 주도하는 사람에게 그 조직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성과’라는 과실을 제공한다.

나는 첫 직장이었던 대우증권에 입사한 초기부터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은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조직 내 분위기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런던현지법인에서 근무할 때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동료들끼리 서로 화합하고 친하게 지내다보니 신기하게도 내가 속한 조직마다 성과가 좋았다. 서로 간의 조화를 만들고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더니 결과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큰 수혜자가 됐던 것이다.

2005년 동원증권과 한투의 합병을 통해 탄생한 한국투자증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도 배려와 화합을 강조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권유했다. 누군가 설령 자신에게 불만을 갖고 있더라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대부분은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모두가 친해지니 힘들 때 위로해주고, 잘되면 축하해주는 조직문화가 형성됐다. 구성원들의 회사생활이 행복해지면, 조직은 저절로 발전하고 개인의 성과는 높아져 우리 모두가 수혜자가 되는 것이다.

가끔 사석에서 군대 얘기라도 나오면 “육군 병장 아닌 사람은 군대 갔다왔다는 얘기 하지도 말라. 공수부대나 해병대면 몰라도” 하고 너스레를 떤다. 이등병에서 병장까지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인생의 많은 교훈을 얻었던 군 생활을 반추해보는 지금 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낀다.

유상호 < 한국투자증권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