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연일 일본에 대한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10일 독도를 전격 방문하고 ‘과거사에 대한 일왕의 사과’를 요구한 데 이어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선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정부는 일왕 발언에 대해 공식 항의했다. 이에 따라 독도와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관계는 첨예한 갈등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가 이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총리 등 양국 지도자 간 신뢰가 깨진 데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냉각기가 길어질 것이란 분석이 적지 않다.

◆한·일 냉각기 불가피

일본은 이 대통령의 일왕 사과 요구에 대해 이날 야스쿠니신사 참배 강행과 외교적 항의 카드를 빼들었다. 겐바 고이치로 외무상과 노다 총리에 이어 정치권과 우익세력은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노다 총리는 “유감스럽다”고 했고, 겐바 외무상은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항의했다고 밝혔다.

고가 마코토 전 자민당 간사장은 “진심으로 유감스럽다”며 “일·한 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향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익 성향의 아베 신조 전 총리도 왕이 방한할 환경이 아닌 상태에서 이 대통령의 발언은 “너무도 예의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친한 성향의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는 “이 대통령은 일본을 이해하는 대통령이라고 생각해왔다.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매우 놀랐다. 일·한 관계에 찬물을 끼얹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선 일왕을 정치적으로 언급하는 게 금기시될 정도로 사실상 신격화돼 있기 때문에 일본 정치인들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이날 마쓰바라 진 국가공안위원장 겸 납치문제담당상과 하타 유이치로 국토교통상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세계 제2차대전 종전기념일에 현직 일본 각료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것은 2009년 9월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이후 처음이다. 2009년 8월 총선을 앞두고 발간한 정책자료집에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반대한다’는 문구를 넣었던 집권 민주당이었다.

◆노다 총리 위안부 외면에 실망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일왕에 대해선 우리 정부가 더 이상 언급할 게 없다. 이 대통령의 일왕 언급도 사전에 준비된 게 아니라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어쨌든 일왕 방한이 논의된다면 진정성 있는 사과가 전제돼야 하는 것 아니냐”며 “대통령이 그에 대한 평소 생각을 밝힌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못할 말을 한 게 아니다’란 얘기다.

이 대통령이 독도 방문과 함께 연일 일본에 대해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배경에는 노다 총리 등 일본 지도층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귀띔이다.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임기 초 일본에 과거사를 따지기보다는 경제 협력 등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중시할 생각이었다”며 “그러나 종군위안부 할머니와 같은 최소한의 인도적 조치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노다 총리가 외면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일본 언론이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하는 데 대해서도 불만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통령이 2008년 방일 때 후쿠다 야스오 총리에게 독도 영유권에 대한 중학교 교과서 명기를 ‘기다려 달라’고 언급한 것처럼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한 것이나, 최근 독도 방문 사실을 사전에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는 틀린 사실을 교도통신 등이 보도한 것에 분개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한·일 간에는 당분간 외교 마찰이 지속될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이달 말 서울에서 열린 예정이던 한·일 재무장관 회담의 연기를 요구했고 노다 총리가 셔틀외교 차원에서 방한하는 것도 재검토 중이다. 양국 간 현안인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등도 진전이 이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차병석 기자/도쿄=안재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