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연금제도 취재차 호주를 다녀왔다.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골드코스트 외곽 볼클럽에서 화사한 색의 옷을 입고 게임을 즐기는 노인들의 밝은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호주자산운용협회(FSC) 연차총회에서 ‘아시아 펀드 패스포트’ 도입을 적극 주장한 현지 운용업계 사람들이었다. ‘아시아 펀드 패스포트’란 특정 요건을 충족하는 역내펀드에 대해 별도의 규제 없이 각국에서 교차판매를 허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이 두 모습 뒤에는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이라는 호주의 퇴직연금제도가 공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슈퍼애뉴에이션은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과 기업의 기여금(근로자 연봉의 9%) 납부를 강제화한 제도다. 호주 최대 퇴직연금운용사 AMP에 따르면 호주 국민의 은퇴 시 예상 자산규모는 평균 57만호주달러(약 6억8000만원)로 추정된다. 이 중 74.4%가 슈퍼애뉴에이션 자산이다. 호주 근로자들이 60세 이후 받는 퇴직연금은 직장 다닐 때 소득의 50% 수준이다. 퇴직연금의 소득대체율이 12%에 불과한 한국과는 차이가 크다. 호주인이 노후를 별 걱정 없이 지내는 데는 슈퍼애뉴에이션이 큰 몫을 한다.

퇴직연금 덕에 노후 '든든'

호주가 ‘아시아 펀드 패스포트’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신감 또한 슈퍼애뉴에이션이 바탕이 된다. 호주 자산운용업계의 운용자산 규모는 1992년 슈퍼애뉴에이션 도입 이후 연평균 9.9%씩 성장, 지난해 1조7900억호주달러로까지 팽창했다. 세계 3위이자 아시아 1위다. 슈퍼애뉴에이션은 기업과 금융회사가 직접 계약을 맺는 한국과 달리 가입자가 산업별, 기업별로 다양하게 조성된 기금을 선택해 가입하는 ‘기금형’으로 운영된다. 기금별로 자금운용 규모가 커지다보니 특화전략을 쓰는 운용사들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펀드산업이 활성화됐다. 2008년 금융위기 때 호주 증시가 크게 흔들리지 않은 것도 슈퍼애뉴에이션 자산이 ‘안전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호주는 슈퍼애뉴에이션을 근간으로 농업 및 광업 중심의 1차산업 국가에서 ‘금융강국’으로 거듭났다. 호주 금융산업의 GDP 대비 비중은 12% 수준이지만 경제성장 기여도는 1위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금융발전지수에서도 호주는 홍콩 미국 영국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 5위에 올랐다. 한국은 18위다.

금융산업도 동반 성장

노무현 정부는 9년 전 ‘동북아 금융허브’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제조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고, 금융산업이 발전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현 정부 들어 ‘금융허브’ 대신 ‘금융 중심지’로 용어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추진 중’이다. 변화는 있었다.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는 한국투자공사를 설립했고, 자본시장통합법도 만들었다. 헤지펀드도 도입됐다. 외형적으론 뭔가 하나씩 갖춰 가고 있다. 하지만 ‘금융허브’에 가까워지고 있냐면 ‘글쎄’다. 오히려 “요즘처럼 금융회사들이 ‘공공의 적’ 취급을 받고 규제의 대상이 된 상황에선 금융허브가 되겠다는 목표 자체가 민망하죠”라던 한 자산운용사 사장의 말이 더 와닿는다.

한국의 금융산업, 특히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아우르는 금융투자업계는 아직 갈길이 멀다. 잘못된 점은 엄하게 꾸짖더라도 잘 키워야 한다는 목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금융산업 육성은 ‘한국판 골드만삭스’ 등 거창한 구호를 내걸거나 국제금융센터(IFC) 건물을 멋있게 짓는다고 달성되지 않는다. 국민들의 노후생활 대비를 위해 슈퍼애뉴에이션을 도입·운영하고 이 과정에서 자산운용업계와 금융산업을 키워 낸 호주 사례가 훨씬 현실적이다.

박성완 증권부 차장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