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종 결과를 단정 짓기는 이르다. 그렇다고 ‘역전 골’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보인다. ‘홈 어드밴티지’에 심판 판정까지 석연치 않다.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애플과 벌이고 있는 특허소송 얘기다.

처음부터 힘든 싸움이었다. 재판이 열린 곳은 애플의 홈그라운드다. 주부, 사회복지사, 무직자 등 비전문가로 배심원단 대부분이 구성됐을 때부터 결과는 예견됐다.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 복잡한 기술보다는 디자인이 닮았는지를 따지는 감성적 판단이 우세했다.

‘세기의 소송’으로 불린 삼성과 애플 간 특허소송의 배심원 평결에서 삼성전자가 ‘완패’했다. 손해배상금액만 1조2000억원에 달했다. 애플의 디자인만 인정받고 삼성의 기술특허는 철저히 무시됐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는 물론 한국에서도 이처럼 일방적인 판결은 없었다.

최대 피해자는 직사각형?

700여개에 달하는 쟁점을 22시간 만에 처리하는 등 배심원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미국에서도 터져 나왔다. ‘보호무역주의’나 ‘자국 이기주의’가 반영됐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판사의 최종 판결이 남아 있지만 결과가 뒤집어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번 평결이 갖는 의미는 여러가지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이 애플의 고유 디자인으로 인정됐다. ‘최대 피해자는 직사각형’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하지만 본질은 미국에서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로 대표되는 디자인 특허가 한층 강화되는 흐름이 반영됐다는 점이다. 트레이드 드레스는 상품의 외관이나 느낌을 포괄하는 지식재산권 보호 장치다. 다른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돈도 돈이지만 ‘카피캣(모방꾼)’이란 오명을 떠안을 수 있다는 점은 삼성전자에 더 뼈아프다. 그동안 쌓아올린 브랜드 이미지를 단번에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플은 당장 삼성 제품 8종의 판매금지를 요청하며 공세를 펴고 있다.

비정한 비즈니스 세계의 일면도 엿보인다. 구글은 “특허 침해가 인정된 부분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와는 무관하다”며 선긋기에 나섰다. 평결 여파가 안드로이드 진영 전체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8 운영체제를 적용한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내놓으며 안드로이드 의존도 낮추기에 들어갔다.

'게임 체인저'로 성장해야

삼성이 잃은 것만 있을까. 애플은 130조원의 현금을 보유한 세계 1위 부자기업이다. 애플이 소송전을 벌인 것은 손해배상금보다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삼성전자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2010년만 해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이 8%에 그쳤다. 하지만 혁신적인 기술과 창의코드를 제품에 꾸준히 반영하면서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로 올라섰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도 애플과의 양자구도로 바꿔놨다.

삼성전자는 더이상 ‘빠른 추격자’가 아닌 게임의 룰을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 조건을 갖췄다. 스마트폰의 두뇌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통신칩, 디스플레이, 메모리 등 하드웨어 경쟁력은 세계 최고다. 갤럭시S3를 통해 인간 중심의 사용자경험(UX) 등 삼성만의 혁신 색깔을 보여줬다.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은 일부 심판들의 편파 판정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당당히 종합 5위 성적을 거뒀다. 삼성의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다. 전투(소송)에서는 지더라도 전쟁(시장)에서 승리할 수 있다. “소비자들은 ‘소송’이 아닌, ‘혁신’을 지향하는 회사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삼성의 믿음이 시장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양준영 IT모바일부 차장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