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제 발등 찍는 미국의 산업 징고이즘
미국 디트로이트에 다시 비상이 걸린 건 1989년이었다. 일본 차에 밀려 크라이슬러가 파산에 직면했던 것이 10년 전,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했는데 이번엔 렉서스였다. 보닛에 피라미드처럼 쌓아놓은 샴페인 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크로바트 같은 렉서스 LS400 론칭 광고는 빅3 경영진에겐 한 편의 공포영화였을 것이다.

놀라웠다. 모든 수치가 파격적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격이었다. 성능은 미국 차를 뛰어넘어 벤츠나 BMW의 대형차 수준이었지만 가격은 중형 모델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미국 대형승용차 시장 석권은 시간 문제였다. 소형차나 만들던 일본을 이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국 정부가 나선 것은 1981년이었다. 일본 차의 공습으로 미국산 자동차 판매가 5년간 3분의 1이나 줄어든 터였다. 30만명의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빅3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일본 자동차 수입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본 정부와 업계를 겁박했다. 그래서 체결된 것이 이른바 자율규제협약(VRA)이다. 형식은 자발적이라지만, 결국은 수입쿼터제도였다. 최대 시장의 압박을 피할 길은 없었다. 일본차 수입쿼터가 1981년부터 3년간은 연간 168만대, 1984년부터 2년간은 185만대로 묶였다.

압박은 거기서 멈추질 않았다. 미국은 1985년 무역적자 해소를 명목으로 엔화의 팔을 비틀었다. 엔·달러 환율을 절반 수준으로 낮춘다는 플라자합의에 일본의 수출 제품 가격은 단숨에 두 배로 올랐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수출이 대수로 묶이고 가격이 두 배로 올랐으니 싸구려 소형차를 포기하는 방법밖에. 도박이었다. 렉서스 LS400 한 차종 개발에만 그 당시 1조원이 투입됐다. 혼다도 닛산도 경쟁적으로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브랜드가 어큐라와 인피니티다.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미국 덕분에 일본 자동차산업은 본격적인 재도약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일본이 고급차 시장으로 올라가고 비어버린 소형차 시장도 미국 몫은 아니었다. 저임금으로 무장한 한국이 그 자리를 메웠다. 현대자동차의 미국 진출이 가능해진 배경이다.

[김정호 칼럼] 제 발등 찍는 미국의 산업 징고이즘
사실 미국이 이런 식으로 버텨온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자동차나 전자만이 아니다. 섬유가 그랬고, 기계류와 철강이 그랬다. IT 등 일부 혁신 분야를 제외한 제조업 대부분이 그 모양이었다. 위기다 싶으면 언제나 덤핑제소 VRA 같은 규제가 마구잡이 식으로 동원됐다.

결과는 어땠을까. 미국 산업이 튼튼해졌을까. 일본차의 역공에 시달리던 빅3는 다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다임러에 넘어갔던 크라이슬러는 다시 사모펀드에 매각됐고, 미국의 자존심 GM은 2009년 파산했다. 미국 정부가 디트로이트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다. 때마침 터져 나온 것이 도요타의 대규모 리콜 사태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어쨌든 일본 자동차산업은 큰 상처를 입었고, 빅3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깊은 수렁을 탈출했다. 경쟁력이 회복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미국의 애국주의적 산업 보호는 결과적으로 제 발등만 찍었다. 경쟁국의 체질만 강화시키고, 시장 참여자들만 늘려놓았을 뿐이다. 게다가 모든 피해는 소비자들에게 돌아갔다. 미국의 국제무역위원회(ITC)는 1981년의 VRA가 미국차 값을 660달러, 일본차 값을 1300달러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미국 법원이 삼성과 애플의 스마트폰 특허소송에서 애플의 손을 들어주고 1조원이 넘는 배상금을 물렸다. 코오롱에는 듀폰의 아라미드 섬유 기술을 무단 도용했다며 향후 20년간 전 세계 생산·판매금지를 명령했다. 심지어 듀폰이 코오롱의 전산망에 접근해 영업 내용을 다 뒤져봐도 좋다는 판결까지 내렸다. 황당하기 짝이 없다.

미국의 산업 징고이즘(jingoism·편협한 애국주의)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대놓고 압박하던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계산된 결과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판사와 배심원들이 일심동체로 내린 판결에는 그 흔적이 역력하다. 도로교통안전국의 도요타 리콜도 마찬가지다. 20세기의 람보식 애국주의가 유령처럼 살아 움직이는 곳이 미국이다. 이런 풍토에서 과연 혁신과 경쟁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 산업의 내리막길은 더욱 가팔라지는 것 같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