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4000만원 vs 1조2000억원
삼성전자-애플 특허소송에서 미국 배심원단이 내린 1조2000억원의 배상금 평결에 누구보다 놀란 건 국내 특허권자들일지 모른다. 서울 중앙지법이 애플에 물린 4000만원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액수다. 미국에서 1조원이 넘는 배상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당장 듀폰과 분쟁 중인 코오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듀폰과 몬산토 간 소송에서도 배상금이 1조원을 초과했다. 센토코와 아보트 간 의약품 분쟁에서는 배상금이 무려 2조원에 근접한 적도 있다. 루슨트와 마이크로소프트, 칼린테크놀로지와 메드트로닉스 간 소송도 배상금이 각각 1조7000억원, 1조5000억원에 달해 화제가 됐다. 유명한 폴라로이드와 코닥 간 분쟁에서도 배상금은 거의 1조원에 달했다. 물론 고액 배상은 항소심에 가서 뒤집어지거나 타협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업에 치명적일 수도 있다. 게다가 미국에서 특허권자의 승소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홈 그라운드 배심원 평결에서 80%, 나중에 뒤집어진다 해도 66%라는 통계가 있다.

“그래도 미국이 부럽다”

특허괴물이 미국에서 주로 출몰하는 이유도 특허권의 강한 보호 때문이다. 최근에는 너무 심하다 싶었던지 변화의 움직임도 감지된다. 미 대법원이 특허권자의 과도한 권리행사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게 그렇다. 특허권의 미흡한 보호는 발명과 혁신 의욕을 감퇴시켜 지식재산 창출 동기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지만, 특허권의 지나친 보호는 발명의 이용을 저하시키고 때로는 공익에 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 경쟁당국도 특허권 남용을 주시하는 분위기다. 미국 내에서 나오는 애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도 국내 특허권자들은 미국이 꽤나 부럽다는 눈치다. 특허 남용은 둘째치고 법적인 보호라도 제대로 받아봤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이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이 애플에 물린 배상금 4000만원은 국내 특허소송 평균 배상금 5000만원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한국에서는 배상을 청구해도 판결이 청구액의 10분의 1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변호사 비용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다. 2000~2009년간 미 특허소송 평균 배상금 120억원과 비교해도 천양지차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특허침해소송에서 특허권자 승소율도 너무 낮다. 2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특허 무효율은 소송단계까지 포함하면 70%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이쯤 되면 특허 남용은 언감생심이다. 그건 차라리 사치에 가깝고 아예 ‘특허무용론’이 나온다. 오죽하면 외국기업이 한국에서 소송을 당해도 겁내기는커녕 우습게 알 정도다.

판사 탓? 특허청 탓?

뭐가 잘못된 건가. 당장 법원도, 판사도 특허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부터 나온다. ‘콜럼버스 달걀’처럼 처음 착안하는 건 어렵지만 나중에 보면 당연해 보이는 ‘사후적 고찰’ 함정에 빠진 게 아니냐는 얘기다. 특허청도 자유로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특허청은 무효될 개연성이 있는 특허권에 대해 심판이 청구된 것이라 무효율이 높다고 둘러댄다. 1~2년 동안 심사를 거쳐 자기들이 내준 특허다. 그것도 심사료, 등록료, 유지비용까지 다 챙기면서. 그래놓고 소송에서 특허가 무효되면 내 알 바 아닌가. 특허출원한 사람만 바보로 만드는 꼴이다. 특허청은 심사기간 단축을 말하기 전에 심사부터 제대로 하라는 주문이 나오는 이유다. 여기에 건수 위주의 변리사 수임구조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백날 특허강국 떠들어 봤자 이런 상황에서 될 턱이 있나.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