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11시 천안역 광장에는 간호사 3000여명이 모여 들었다. 간호사라는 직종이 한국에 상륙한 지 약 100년 만에 처음으로 간호사 집회가 열린 것이다.

이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간호조무사(의사 또는 간호사의 진료와 업무를 도와주는 사람) 문제 때문. 최근 민주통합당 양승조 의원(천안갑)은 간호조무사의 지위를 올려주는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명칭을 ‘간호실무사’로 바꾸고, 간호사처럼 보건복지부 장관이 면허를 주는 것으로 바꾸자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날 간호사 집회는 이 법안을 비판하는 구호로 가득 찼다. 성명숙 대한간호협회 회장은 “의료인이 아닌 간호조무사에게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은 기존 의료계 면허체계를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간호조무사협회도 이날 천안시 동남구 천안터미널에서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법개정 촉구를 위한 집회를 열고 맞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갈등

연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의료계가 전방위 갈등을 빚고 있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뿐만 아니라 의사 한의사 물리치료사 등도 집단이익을 앞세워 곳곳에서 마찰을 빚고 있다. 이 와중에 정부와 건강보험공단도 휘말려들어 어떤 단체들이 무슨 이유로 대립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 5일 서울 계동 보건복지부 청사 앞에서는 수백명의 물리치료사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복지부가 최근 “한의원에 근무하는 간호조무사도 물리치료 업무를 보조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자 이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조무사들이 대부분 한의원에서 물리치료를 하고 있지만 이는 불법이라는 주장이다. 구봉오 물리치료사협회 회장은 “초음파 기기의 부작용을 모르는 조무사들이 함부로 치료행위에 나설 경우 어린이 임산부의 건강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 한의사들은 오히려 한걸음 더 나가고 있다. 초음파치료기 등 현대적 의료기기들을 합법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법정 공방까지 병행

한의사들은 천연물신약 처방권을 놓고 의사들과도 부딪치고 있다. 천연물신약은 약초 등을 사용해 한약제조 방식으로 만든 의약품. 최근 천연물신약에 대한 허가가 늘어나자 한의사들은 독점적 처방권을 요구했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양의사가 한약을 원료로 제조된 의약품인 천연물신약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의사협회는 “말도 안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의사협회는 포괄수가제를 놓고 건강보험공단과도 충돌하고 있다. 최근 포괄수가제 확대를 놓고 각을 세웠던 양측의 감정싸움은 최근 감사원 감사와 검찰 맞고소로 이어졌다. 의사협회는 포괄수가제 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해 의사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일부 건보공단 직원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또 건보공단의 호화청사 등을 문제 삼아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했다. 이에 건보공단 노조는 의사협회 노환규 회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것으로 맞섰다. 의사협회는 이 밖에도 의사정원 확대, 성범죄자 의사면허 박탈 등을 놓고는 정부 및 국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정치세력화도 시도

이 같은 의료계 분쟁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물밑에 있던 쟁점들이 모두 다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또는 다른 단체와 분쟁을 벌임으로써 내부를 결집하고 대선국면에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다.

실제 공개적으로 정치세력화를 시도하는 단체도 있다. 문태준 의사협회 명예회장은 최근 기자회견을 갖고 “올해 대통령 선거를 맞아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돼야하느냐에 대한 회원들의 공감대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의사협회는 오는 13일 서울역광장에서 ‘국민건강 위협하는 의료악법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또 다음달 7일에는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제1회 한마음 전국의사 가족대회’라는 대규모 행사를 열어 세를 과시할 계획이다.

간호사협회도 지난 4일까지 별도의 홈페이지를 통해 민주당 경선 선거인단 참여 캠페인을 벌였다. 간호사의 이해를 대변할 후보가 선출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취지였다.

의료계의 집단분쟁은 마땅한 조정자가 없어 더 격화되는 양상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료계 분쟁은 법률과 관련된 것이 많은 데다 대선을 앞두고 요구의 강도가 광범위해져 정부가 직접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