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용평가시장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올 하반기부터 시행 예정이었던 독자 신용등급 제도가 무산됐다는 얘기를 들은 국제 신용평가사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독자 신용등급 제도는 금융당국이 올초 발표한 신용평가시장 선진화 방안의 핵심이다. 모기업 등 외부의 지원 가능성을 뺀 자체적인 채무상환 능력을 공개해 투자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이미 시행하고 있다.

뒤늦게나마 독자 신용등급 제도가 도입된다는 소식에 투자자들의 기대는 컸다. 신용평가의 투명성이 강화되고 국내 신용등급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신뢰가 높아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금융당국은 최근 연내 도입 계획을 철회했다. 내년에 도입한다는 얘기도 없다. ‘무기한 연기’를 선언해 이 제도를 도입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독자 신용등급 발표가 기업의 조달비용 상승으로 이어져 가뜩이나 침체된 국내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라는 이유를 댔다.

당초 독자 신용등급 도입을 반긴 쪽은 투자자들뿐이었다. 기업들은 대놓고 반대했다. 기업으로부터 신용평가 수수료를 받는 신용평가사도 부담스러워했다. 금융당국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불만이 신경 쓰였다.

최근 금융당국이 기업을 대상으로 독자 신용등급 제도 도입에 대한 설문을 진행한 것은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행동이었다. 불리하게 작용할 게 당연한 제도 도입에 찬성표를 던질 기업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저런 이유로 수차례 시행 시기가 연기됐고, 시장에서는 금융당국이 독자 신용등급 제도 도입 의지를 접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불확실한 국내외 경기전망은 금융당국에 좋은 핑계거리가 됐다.

국내 신용등급은 50% 가까이 AA급 이상 우량 등급에 몰려 있다. 기업의 입김에 휘둘려 신용평가사들이 소신껏 평가에 나서지 못한 결과다. 시장에서는 독자 신용등급 발표가 이 같은 등급거품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으로 전망했다. 기업들의 조달비용이 당장은 비싸지더라도 신용등급의 적정성과 타당성에 대한 투자자들의 믿음이 강해지면 중·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될 것이란 전망도 많았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금융당국의 태도에 국내 신용평가시장의 선진화는 다시 한번 요원해졌다.

김은정 증권부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