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쿠, 이 노인네, 아직도 젊은 아가씨를 찾고 있구먼.”

괴테(1749~1832)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트 대공이 놀려댔다. 놀림을 당할 만도 했다. 73세의 대문호 괴테가 맘에 둔 아가씨 울리케는 이제 겨우 19세. 둘 사이에는 무려 54년의 어마어마한 생물학적 시간 차가 존재했다.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쓰럽고 민망한 마음에서 대공이 한마디 한 것이다.

괴테가 울리케를 처음 만난 것은 이보다 2년 전. 울리케가 17세(18세라는 설도 있다) 때다. 괴테는 해마다 온천지로 유명한 카를스바트에서 여름을 보냈다. 1820년에는 인근으로 소풍을 나섰다가 마리엔바트라는 곳에서 원시적인 매력을 간직한 온천지를 발견한다.

이듬해에는 아예 카를스바트 대신 마리엔바트에 거처를 정했다. 괴테는 그곳에 자기 인생의 마지막 여인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클레벨스베르크 하우스에 머물렀는데 이곳은 클레벨스베르크 백작 소유로 함께 살고 있는 레벤초 부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에겐 울리케, 아말리에, 베르타 등 세 딸이 있었는데 괴테는 큰 딸 울리케에게 매혹되고 말았다. 차분한 성품의 울리케는 막 소녀티를 벗고 은은한 여인의 향기를 뿜어냈다. 금발에 커다란 눈, 도톰한 입술을 한 인상적인 마스크에다 호리호리한 몸매가 부인과 사별한 지 4년이 된 괴테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괴테는 본심을 숨긴 채 울리케에게 접근했다. 할아버지와 손녀뻘 되는 아가씨의 만남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괴테는 그 점을 십분 활용했다. 여인의 마음을 훔치는 데 일가견이 있던 괴테인지라 그는 서두르지 않고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처음에는 호텔에서 식사를 하거나 산책할 때 자연스럽게 만나는 방식을 취했다. 때로 과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주위의 의심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울리케에게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선물하며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알렸고 울리케는 저명한 인물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싫지 않았다.

괴테는 이듬해에도 마리엔바트를 찾았다. 이번에는 울리케에게 좀 더 친밀한 제스처를 보였다. 그는 말린 꽃다발을 유리액자에 넣어 선물해 여심을 자극했다. 물론 이 순진한 처녀는 괴테가 딴 맘을 먹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괴테가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한 것은 울리케를 만난 세 번째 여름인 1823년. 그해 여름휴가는 예기치 않은 엇박자로 시작됐다. 사랑스러운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 클레벨스베르크 하우스에 묵을 수 없게 됐다. 바이마르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이 호텔을 통째로 세냈기 때문이었다. 괴테는 할 수 없이 인근의 ‘황금포도송이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울리케에게 청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린 아가씨에게 직접 청혼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해보이지 않았다. 대문호이자 대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했다. 괴테는 자신을 놀려대는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울리케의 어머니인 레벤초 부인을 설득해달라고 졸랐다.

대공은 결국 레베초 부인을 찾아 괴테의 뜻을 전했다. 물론 부인은 크게 놀랐다. 딸 가진 부모의 심정으로는 그랬다. 괴테의 명성이 아무리 높다한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고령이 아닌가. 레베초 부인은 딸 울리케에게 선택을 넘겼다. 부인은 울리케의 사려분별을 믿었다. 아우구스트 대공도 부인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괴테를 자상한 아버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울리케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진지한 성격의 울리케는 자신이 거절함으로써 괴테가 겪을지도 모를 마음의 상처가 더 걱정이었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도 생각했다. 고심 끝에 정중하게 아우구스트 대공을 통해 거절의 뜻을 전달했다. 자신이 괴테의 집안에 들어갈 경우 괴테의 아들보다도 어린 데다 재산 분배를 놓고 갈등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실제로 괴테가 청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괴테의 아들 아우구스트는 집에서 나가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괴테의 청혼이 있은 후 레베초 일가는 황급히 카를스바트로 떠났다. 괴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울리케와 직접 만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는 울리케 일가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쫓아 함께 머물렀다. 현명한 레베초 부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괴테를 대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괴테는 울리케에게 사랑 고백을 했던 게 아닐까. 확실한 것은 1823년 9월5일 울리케가 괴테에게 작별의 키스를 건넸다는 점이다.

괴테는 상처받은 마음을 부여안고 집으로 향했다. 바이마르로 가는 여정 내내 그는 고통스런 실연의 아픔을 삭이며 세계문학사에 길이 빛날 명작을 한 줄 한 줄 써내려 나갔다. ‘마리엔바트의 비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괴테의 총애를 받았던 울리케의 운명은 의외로 박복했다. 그는 아주 매력적인 여인으로 성장, 뭇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지만 이를 한사코 물리쳤다. 울리케는 양부인 클레벨스베르크 백작의 성에 거처하며 92년의 긴긴 생애를 독신으로 외롭게 살았다.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괴테의 영혼의 포로가 된 것일까. 이루지 못한 둘의 사랑은 그렇게 문학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불멸의 전설이 됐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