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금 회장은…브리태니커 외판원 출신 '샐러리맨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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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금 회장 법정관리 신청후 첫 인터뷰
1971년 7월 부산의 한 중소기업 사장실. 무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두 손에 브리태니커 사전을 들고 있는 한 청년이 호통 소리와 함께 사장실 밖으로 쫓겨나왔다. 청년은 길거리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일즈맨은 내 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잠기는 것도 잠시, 손님들로 둘러싸인 노점상을 보자 벌떡 일어섰다. “계약을 못 따내면 오늘 굶는 거야.” 결국 서른 번이 넘는 도전 끝에 그는 첫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것도 영세한 합판가게 사장으로부터였다.
국내에서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최고경영자(CEO)로 꼽히는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젊은 시절 얘기다. 윤 회장은 고단했던 젊은 시절 경험을 자양분 삼아 1980년 직원 7명의 학습지 출판사 웅진씽크빅(옛 웅진출판)을 설립하며 CEO로서 첫발을 뗐다.
교육출판을 시작으로 환경생활, 태양광, 소재, 건설레저, 식품, 서비스금융 분야에 잇따라 진출, 15개 계열사를 둔 재계 32위 그룹을 일궈내며 ‘탁월한 경영자’로 명성을 이어 나갔다.
윤 회장은 통 큰 결단력의 승부사로도 유명하다. 1999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알짜 계열사 코리아나화장품을 팔아 위기를 이겨냈다. 내수 침체로 정수기 사업 성장이 정체됐을 때는 국내 최초로 ‘렌털 시스템’을 도입, 숨통을 트게 하는 것을 넘어 웅진코웨이가 국내 정상 생활가전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창립 32년째인 올해 윤 회장이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그룹이 해체 위기를 맞은 가운데 윤 회장은 지주회사 웅진홀딩스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그룹 측은 “책임경영의 의지”라고 설명했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
국내에서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최고경영자(CEO)로 꼽히는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젊은 시절 얘기다. 윤 회장은 고단했던 젊은 시절 경험을 자양분 삼아 1980년 직원 7명의 학습지 출판사 웅진씽크빅(옛 웅진출판)을 설립하며 CEO로서 첫발을 뗐다.
교육출판을 시작으로 환경생활, 태양광, 소재, 건설레저, 식품, 서비스금융 분야에 잇따라 진출, 15개 계열사를 둔 재계 32위 그룹을 일궈내며 ‘탁월한 경영자’로 명성을 이어 나갔다.
윤 회장은 통 큰 결단력의 승부사로도 유명하다. 1999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알짜 계열사 코리아나화장품을 팔아 위기를 이겨냈다. 내수 침체로 정수기 사업 성장이 정체됐을 때는 국내 최초로 ‘렌털 시스템’을 도입, 숨통을 트게 하는 것을 넘어 웅진코웨이가 국내 정상 생활가전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창립 32년째인 올해 윤 회장이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그룹이 해체 위기를 맞은 가운데 윤 회장은 지주회사 웅진홀딩스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그룹 측은 “책임경영의 의지”라고 설명했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