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프로기사라기보다 ‘애기가(愛碁家)’ 수준에서 두고 있습니다. 갬블러로서의 차민수도 은퇴했고요, 지금은 카지노 컨설팅에 힘을 쏟고 있어요.”

2003년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올인’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차민수 카지노인터내셔널그룹 회장(61·프로기사 4단·사진). 그가 지난달 한게임팀 감독을 맡아 ‘KB국민은행 한국바둑리그’에서 정규시즌 우승을 이끌었다. 서울 영등포구 카지노인터내셔널그룹 사무실에서 최근 차 회장을 만났다.

미국 카지노계 ‘지존’에 올랐다가 ‘올인’ 방영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배경부터 물었다. 그는 “고국의 부름이 있었다”고 말했다. “2005년께 한국관광공사가 외국인 전용 카지노 ‘세븐럭’(GKL에서 운영하는 코엑스점, 힐튼호텔점, 부산 롯데호텔점)을 설립하면서 도움을 청했어요. 영업이사를 맡아 카지노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전했죠.”

이어 2007년엔 카지노인터내셔널그룹을 설립, 카지노 관련 컨설팅 및 교육, 투자사업에 나섰다. “한국에서 카지노 컨설턴트는 제가 유일할 겁니다. 컨설팅은 주로 해외 카지노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요. 한국에선 카지노산업이 규제 대상이어서 활발하지 않습니다. 동남아 쪽에서 특히 카지노 수요가 많아요. 화교나 일본 자본이 많이 움직이고 있어요.” 국내 제주오리엔탈호텔 카지노, 미얀마 경제자유구역에 있는 카지노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지금은 인천국제공항 인근에 들어설 외국인전용 카지노 설립의 자문을 맡고 있다고 전했다.

차 회장이 들려준 ‘젊은 시절 카지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는 한때 바둑계의 절대 강자였다. “1974년 프로 입단 전 아마추어 전국대회 대부분을 석권했었죠. 대학 시절 한일 대학생 바둑교류전에 국가대표 주장으로도 참가했었고요.”

20대 초단 바둑 강자로 주목받던 차 회장은 동국대 3학년 때 돌연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시민권자였던 누나의 초청으로 새로운 세상에서 도전의 길을 택했다. 이런 배경엔 그의 다재다능한 능력이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수 없게 만든 요인도 있었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영등포 경원극장 등 예식업과 극장으로 사업을 크게 일군 어머니는 돈보다 재주를 남겨준 것 같아요. 덕분에 제가 프로급 실력으로 내세울 만한 게 15개 정도는 됩니다. 바둑이나 카드게임 말고도 쿵푸 7단(현재 소림쿵푸협회장), 탁구, 스케이팅 등 웬만한 스포츠는 상당한 수준까지 익혔습니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2004년 회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차 회장은 “미국으로 건너간 직후 카드게임에 빠져들었고 인생의 위기와 기회가 함께 닥쳐왔다”고 회고했다. “파산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운명같이 한 포커선생을 만났어요. 치프 존슨 캘리포니아주립대 포커학과 교수가 찾아왔어요. 아마바둑 초단 실력이던 그는 포커를 가르쳐줄 테니 대신 바둑을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하더군요.”

전성기를 구가한 1986~1996년 그는 포커 세계챔피언(1996년)에 오르는 등 수입과 승률에서 랭킹 1위였다. “미국에서는 내가 2005년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간 것을 지금도 미스터리로 여깁니다. 당시 미국 카지노업계에선 차민수를 넘버 원으로 쳤거든요.” 그가 활동할 때 쓰던 애칭 ‘지미지미’(미국 이름 ‘지미 차’에서 따온 것)는 미국 카지노업계에서 지금도 통한다고 그는 밝혔다.

차 회장은 카지노를 단순히 도박이 아닌 국가 전략 서비스산업으로 봐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카지노는 그 자체로도 경제적 효과가 크지만 더 중요한 건 일종의 미끼산업이란 점입니다. 라스베이거스가 버는 돈 가운데 카지노 자체는 15%가 채 안 돼요. 나머지는 사람을 끌어들여 컨벤션이나 쇼핑, 호텔 등에서 소비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홍성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