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간 녹십자에서 잔뼈가 굵은 조순태 녹십자 사장(58)은 회사의 앞날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다. ‘불확실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헌터라제 성과가 예상보다 빨리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5월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8차 아시아소아과학연구학회’의 주제는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인플루엔자와 헌터증후군이었다. 녹십자는 헌터라제 개발의 주역으로 국내 제약회사 중 유일하게 이 학회에 초대됐다. 조 사장은 “기존 치료제가 듣지 않던 환자에게 헌터라제를 처방한 결과 투약과정이 순조로웠고 결과도 좋았다”고 말했다.

녹십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2009년 ‘월급쟁이의 꿈’이라는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그는 재직 중에 가장 기억 나는 순간으로 1983년 ‘국민백신’인 B형간염 백신 ‘헤파박스-B’를 개발했던 때를 꼽았다. 두 번째는 2009년 드라마틱하게 신종플루 백신 공급이 이뤄졌을 때라고 한다. 조 사장은 “백신은 녹십자의 상징이기 때문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불특정 다수가 접종을 맞기 때문에 부작용이 나타나면 비난의 화살을 온통 뒤집어쓰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조 사장이 ‘미래 제약산업의 금맥’으로 불리는 바이오의약품에 도전장을 냈다. 그는 “바이오의약품은 고도의 생명공학, 화학, 의학, 제약 기술의 총체이기 때문에 고용 유발효과도 어마어마하다”고 강조했다. 평소 갖고 있던 ‘기업의 본질은 이윤추구, 사명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신념을 바이오의약품 신약개발을 통해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는 또 “시너지가 나는 기업과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통해 신제품을 개발하고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제약기업의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요즘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국내 헌터증후군 치료 분야 최고 권위자인 삼성서울병원 진동규 교수가 협력을 요청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세계 단 한 곳에서 생산하는 단 하나의 치료제에 의존해야 했던 열악한 현실이 안타까워 의기투합하게 됐습니다. 개발 초기 한 벤처기업으로부터 도입한 기초기술은 그야 말로 실험실 수준의 ‘원석’이었지만, 연구·개발(R&D)과 공정 파트가 톱니바퀴처럼 협력해 성과를 냈습니다. 희귀질환 치료제는 이익이 안 나 개발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고아 약(orphan drug)’으로 불립니다. 그렇지만 진입장벽이 높은 대신 성공시 큰 이익이 기대되는 분야입니다. 블루오션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헌터증후군과 똑같은 효소결핍 원리로 발생하는 파브리병, 고셔병 등 다른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도 큰 소득입니다.”

▶다국적 기업이 버티고 있는 해외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헌터라제의 경우처럼 녹십자는 유행을 좇는 R&D가 아니라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린진F, 아이비글로불린SN, 헌터라제, 수두백신, 독감백신 등 다섯 가지 글로벌 프로젝트는 진입장벽이 높아 경쟁이 낮고 녹십자가 그동안 주력했던 분야와 상통합니다. 수두백신만 해도 녹십자를 포함해 세계 3개 제약사만 생산하고 있습니다. 세계 세 번째로 상용화된 그린진F는 제품의 균질성을 크게 높여 안정적인 생산과 관리가 가능합니다. 녹십자종합연구소는 2008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응고인자를 8개 가진 8인자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밝혔습니다. 당시 글로벌 수준의 세포배양 및 정제기술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혈우병 관련 약품의 세계시장 규모는 약 67억달러로 보고 있는데, 이 중 유전자재조합 제품이 약 50억달러로 그 비중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미국 현지 영업에 어려움은 없습니까.

“중국녹십자는 계속 적자를 보다 최근에 흑자전환했는데, 사실 조마조마했습니다. 중국 의약품도매법인 중 100% 지분을 갖고 있는 외국 기업은 중국녹십자가 투자한 안휘거린커약품판매유한공사가 처음입니다. 의약품 도매에 관한 라이선스 취득이 대단히 어려운 중국에서 이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무리하게 시장 진입에 나서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현지화를 다진 결과라고 봅니다. 중국녹십자는 최근 운영이 시작된 후난성의 혈액원 등 중국 내 총 7곳의 혈액원을 운영하며 알부민, 면역글로불린 등 혈액제제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생산시설 또한 유럽 GMP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에 대해 중국 정부가 신뢰를 보내줬기에 다행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현지법인 GCAM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보증하는 양질의 혈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창고입니다. 지난 5월 미국 새크라멘토에 연간 최대 5만ℓ의 일반 및 특수 혈장 생산이 가능한 혈액원을 세웠습니다. 2개 혈액원에 대한 추가 인수를 진행 중이라 수입을 뺀 연간 자체 혈장 공급량은 20만ℓ를 초과할 겁니다.”

▶이노셀 인수로는 어떤 효과를 기대합니까.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간암 대상 면역세포치료제 품목 허가를 받은 것은 국내에서 이노셀의 ‘이뮨셀-엘씨’가 유일합니다. 기존 종괴(암덩어리) 제거 후 후속 항암제가 마땅치 않던 간암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열 것으로 기대합니다. 최근 CT(Cell Therapy)본부를 신설하고 세포치료제에 관한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습니다. KGMP(한국 우수의약품생산기준시설)인증과 풍부한 임상 경험, 원천 기술을 가진 이노셀과 녹십자의 영업력이 만나면 충분한 시너지가 날 것으로 확신합니다.”

▶장기 투자가 필요한 제약산업의 특성상 조직 운영의 묘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비전이 없다면 개인이든 기업이든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만 이런 비전을 위에서(top-down)가 아닌 자발적(bottom-up)으로 느끼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애사심이 있어야 직원들이 뛰겠죠. ‘건강산업의 글로벌 리더’라는 비전은 모든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모아 만든 겁니다. 미국 심리학자 레이 허버트는 ‘공통된 정체성과 공유된 운명이라는 느낌이 집단응집성을 높인다’고 말했습니다. 기획-R&D-생산-영업 전 파트를 400m 계주로 본다면 어느 한 파트에서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경기에서 지게 됩니다. 각자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약값 인하 등 보건당국의 최근 몇 년간 행정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약값 인하는 업계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지만, 의료재정의 부담을 본다면 감내해야 할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약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발전적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 글로벌 제약사 육성은 과감한 투자와 혁신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런 리스크를 정부가 확실히 이해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정책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글로벌임상시험대행업체(CRO)에 위탁해 R&D를 진행할 때가 많은데, 이 경우 세액공제 혜택이 없습니다. 이런 대목을 보완했으면 합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