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엔 직장인이 아닌 주인으로 일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용진)

“이랜드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여성 최고경영자(CEO)의 꿈을 갖게 됐어요.”(박소영)

올 7월 입사한 이랜드 신입사원 이용진(26)·박소영(25·여) 씨의 눈은 빛났다. 3개월 입문교육 마지막인 ‘이랜드 스피릿 수련회’를 막 끝낸 이씨는 “하늘 위로 붕 뜬 기분이에요. 이 마음이 식기 전에 빨리 배치부서인 전략기획부로 가서 젊음을 불태우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스포츠 패션브랜드 매니저가 될 박씨도 “난 축복받고 선택된 사람”이라며 “초우량기업 이랜드 혁신의 선두주자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들은 끊임없이 캔 두(can do spirit)·세계를 향한 꿈·일보다 사람 등의 단어를 쏟아냈다. 마치 피 속에 이랜드 DNA가 흐르는 것 같았다. 두 젊은 신입사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40대 기자의 가슴도 덩달아 뛰었다.

15일 정식 배치되는 신입 이랜드인들을 지난주 금요일 서울 여의도 렉싱턴호텔 1층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인터뷰에는 올 하반기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한 이랜드 지원자 5명도 함께했다. 마침 이날은 인·적성검사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었기에 이랜드 지원자들은 긴장과 면접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함께 자리한 윤성대 이랜드 그룹 인사팀장은 “상반기에도 인·적성 합격자 발표가 밤 11시가 다 돼서 났어요. 그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을 뽑는 절차마다 이랜드는 신중을 기울입니다”라고 말했다. 역시 이날도 인·적성 결과는 인터뷰가 다 끝난 밤 8시가 돼서도 발표되지 않았다.

이랜드 남자 신입사원 이용진 씨

◆의류학과 생활디자인을 전공한 남학생

“네가 가정대엔 가서 뭐 할 거냐.” 아버지의 반대는 생각보다 컸다. 대입원서 접수를 앞두고 아들은 가출을 결심했다. 평소 아버지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던 아들의 행동에 당황한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손을 들어줬다. 미술을 공부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은 어릴 적부터 엄마 손을 잡고 미술관을 다니면서 미적 감각을 익혔다. 그렇다고 여성성이 강한 남학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장을 도맡아 하면서 중학교 땐 교내 영자신문반을 조직할 정도로 남성성이 강했다. 연세대에서 의류환경학과 생활디자인을 복수전공한 이용진 씨는 후회보다 즐거운 일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남자가 없다 보니 교수

들로부터 이쁨을 독차지했어요. 또, 친구들이 미팅시켜 달라고 얼마나 제게 조르던지… 흐흐흐.”

◆10전11기 ‘공모전 달인’

그토록 아버지를 설득해 입학한 대학은 생각과는 달랐다. 1학년 땐 학사경고를 받을 정도로 학점도 엉망이었다. 그러던 차에 애드파워(AD Power)라는 광고동아리는 이씨의 대학생활을 윤택하게 해줬다. “끼 있는 선배들이 넘쳐났어요. 거기서 광고-마케팅을 배우고 홍보 일을 하면서 기업체 스폰서를 받기도 했지요.” 이씨는 대학 4년 동안 19번의 공모전에 도전, 9번이나 수상했다. 심지어 군대에서 제출한 지구의날 환경공모전에선 대상을 받을 정도였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받은 상금만 모두 700만~800만원에 달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었다. “처음 10번은 계속 떨어졌어요. 그러고 나니 보이더라고요.” 그는 대학생을 위한 공모전 입상 팁도 곁들였다. “우선 주최 측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과 다르게 접근해야 하죠. 예를 들어 여수엑스포 공모전에선 환경을 생각한 정크아트(폐기물로 만든 예술품)로 외국관광객에게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과는 대상이었지요.”

◆“亞시장서 글로벌 기업과 한판 승부 꿈”

대학 3학년 겨울방학. 채용을 전제로 한 인턴 ‘이랜드 글로벌 ESI(ELand Strategy Intelligence : 이랜드 전략기획자원 인턴)’가 눈에 꽂혔다. “하루 4시간밖에 잘 수 없는 강행군이었지만 너무 재미있었어요. 한국에선 창고형 할인매장 마케팅 분석, 중국에선 조인트 벤처 리서치를 했지요.” 인턴 6주를 하면서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랜드에 대한 시각도 바뀌었다. “예전엔 이랜드의 중국시장 성공이 과장됐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상하이 고급 백화점에 입점한 20여개 브랜드의 성공을 보면서 이런 회사라면 내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푼 꿈을 가진 이씨의 비전은 뭘까. “매출 100조원, 영업이익 10조원의 비즈니스를 책임지는 아시아 매스티지 브랜드 1인자가 되고 싶어요. 이를 위해 인도·베트남 등 신시장에서 글로벌 브랜드들과 멋진 승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인도로 달려갈 준비가 돼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의 이메일 ID도 ‘꿈꾸는 이’였다.

이랜드 여자 신입사원 박소영 씨

◆7살 광고모델 소녀 “이랜드는 내 운명”

“이랜드는 내 운명이었어요.” 박소영 씨와 이랜드의 첫 만남은 7살 때였다. 1994년 이랜드 주니어와 리틀 브렌따노 전속 광고모델이 된 것.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입었던 옷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때 꿈을 꾸었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이랜드 회사에 갈거야…’ 모델을 통해 얻은 자신감은 초·중·고 생활 중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줄곧 11년 동안 학급반장을 할 수 있는 원천이 됐다. 키가 크고 생각이 자라면서 그 자신감은 친구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리더십으로 성숙해졌다. 여고 1학년. 놀림을 당하는 한 친구를 위해 그가 나섰다. “빵집 친구가 2학기 반장턱을 냈는데 좀 논다는 다른 애가 ‘그거 팔다 남은 빵 아니냐’며 무시하는 말을 하는 거예요. 분노가 치밀었죠. 다행히 싸움은 없었고 그 일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도 빵집 친구와 절친으로 지낸답니다.”

◆중국 유학서 배운 치열함·끈기

‘글로벌 인재가 되리라.’ 부푼 꿈을 안고 떠난 중국 저장대 유학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초급 중국어 수준으로 일본어학을 전공했기에 공부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함께 대화를 나눌 한국인도 없었다.

유학생활 중 공부와의 싸움은 그에게 치열함이란 선물을 줬다. “1년간은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잠을 안 잤어요. 기숙사방은 중국어와 일본어 단어 포스트잇으로 도배할 정도였죠.” 이런 노력의 결과였을까. 2010년 대학 3학년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게 됐다. 상하이 세계엑스포 때 KOTRA 한국사무관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 “중문기사 번역과 엑스포 홈페이지 기사 게재, 일본어 통역과 의전 지원…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을 정도였죠. 게다가 일본 경제산업상과 도요타 명예회장 등을 바로 옆에서 통역할 수 있는 영광까지 얻게 됐답니다.” 바쁜 와중에도 그는 저장대 한국어 강사, 항저우 한국상회 봉사활동, 일어회화 개인교사를 통해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일을 꾸준히 했다.

◆“10년 뒤 여성 CEO 인터뷰 오세요”

이랜드 입사를 준비하면서 소중한 ‘메모 습관’을 습득했다. 이랜드의 수많은 브랜드 매장을 다니면서 느낀 아이디어를 꼼꼼히 기록하고 정리한 것. 이 수첩을 최종면접 때 임원한테 보여줬다. “회사는 지원자들의 진정성을 보는 것 같아요. 면접과정이 길기 때문에 거짓말하면 금방 들통날 수밖에 없어요. 준비를 못했다면 지금 부터라도 하세요.”

여성 CEO의 꿈을 꾸는 박씨에게 대표 이랜드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뭐냐고 기자가 묻자 ‘책 읽기’라는 답이 돌아왔다. “책에서 금방 답은 안 줘요. 대신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인사이트(insight:통찰력)를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강점으로 일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죠.” 그는 후배들에게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읽어볼 것을 강추했다. “자기 분야에서 1만시간의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있다면 최고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저는 날마다 꿈을 꿉니다.” 박씨는 “20년 뒤 이랜드의 여성 CEO로 변신한 저를 다시 인터뷰하러 오실 거죠”라며 활짝 웃었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