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형형색색 만국기가 펄럭인다. 운동장에는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청군 백군 응원 소리에 귀가 멍멍하다. 천막 아래 쌓인 상품들이 눈길을 끈다. 내 오늘 저것을 집에 가져가리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다. 운동장이 없는 서울시내 학교에서는 가을 운동회를 어떻게 할까? 공연히 걱정이 된다.

최근 법무부 사회복귀과의 연락을 받고 재소자들이 쓴 수필작품을 수십 편 읽고서 심사평을 썼다. 지금은 푸른 수의를 입고 가슴에 번호표를 붙이고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학창시절, 가장 빛나는 추억의 날이 바로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글솜씨가 뛰어난 이도, 모자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글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나도 가을 운동회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몸이 약한 나는 운동회 날이 다가오면 불안감에 잠을 못 이루는 것이었다. 달리기와 기마전 등 몇 개 종목에는 꼭 출전해야 했으므로 꼴찌를 하면 일가친척들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할 거라는 생각에 새가슴이 돼 전전긍긍했다.

5학년 때였는데 그 여자애는 같은 학년은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는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200m 달리기 출발선상에 다른 애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억지로 나가게 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런데 그 애의 표정은 뜻밖에 밝았고,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그애도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한참이나 뒤처져 결승점을 향해 뛰는데 뒤뚱뒤뚱, 흐느적흐느적, 정말 보기에도 딱한 혼자만의 경주였다. 다른 친구들이 다 뛰고 없는 운동장을 혼자서 뛰고 있으니 만인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지사. 여기저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저런 애를 뭐 하러 내보내!” “도대체 어떤 선생이야?” 불만을 토하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다.

그런데 그 애가 한 번도 안 넘어지고 결승점을 향해 뛰어들자 어른이나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모두 힘껏 박수를 쳤다. 정말 콧잔등이 시큰할 정도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 애는 몹시 힘든지 허리를 꺾은 채 호흡을 가누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초등학교 6학년밖에 안 된 그 애는 사람들의 ‘병신취급’에 제 스스로 분연히 일어서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었다. 용기라기보다는 오기가 아니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담임선생님께 출전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는 것이다. 그 애는 지금도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완주한 자기를 위해 손바닥이 아프도록 친 박수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날 이후 나는 신체에 장애가 있는 이들이라고 해서 사람들의 지나친 친절이나 동정적인 시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몸은 좀 불편하지만 그들은 온전한 신체를 가진 사람처럼 대해주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재소자도 마찬가지였다. 영등포구치소와 춘천교도소에 이어 지난봄에는 남부교도소에 몇 달 나갔고, 이번 가을에는 안양교도소에 나가고 있는데 바깥세상 사람의 동정 어린 시선을 그들은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죄 짓고 들어와서 형을 살고 있다고 불쌍한 사람 취급하면 자존심이 상하는지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지금은 비록 형을 살고 있지만 사회로 복귀하면 예전보다 더 멋지게, 성실하게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전과자임을 알게 됐다 하더라도 그를 범죄자 취급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한 순간 큰 실수를 했지만 죄를 뉘우친 사람들로 대하면, 즉 데면데면하게 대하면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다음해 운동회 날 단체 곤봉체조 시간에 곤봉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했지만 얼른 주워들고 계속했다. 배짱이 생긴 덕분이었다. 평발에 팔자걸음이라 달리기에서도 꼴찌를 했지만 예전처럼 고개를 푹 숙이지도, 시무룩해 하지도 않았다. 그 소녀가 나의 큰 바위 얼굴이 된 것이다. 그 소녀는 지금 중년부인이 돼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승하 < 시인·중앙대 교수 shpoem@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