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화국’. 얼마 전부터 뉴스 매체에서 한국을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말할 수 있어야 글로벌 코리아에 적합한 인재라고 인정받는 사회다. 거리의 간판을 봐도 영어 일색이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면 선망의 대상이 된다. 더군다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5세 이전에 영어 발음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제대로 된 발음을 배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밝혀져 영어 교육 열풍은 유아들로까지 확대되는 추세다.

기업들도 다르지 않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영어 성적은 필수며, 요즘은 영어 인터뷰도 보편화됐다. 기업들은 자원이 부족하고 시장이 작은 한국에서는 한계가 있어 창업부터 세계화를 추진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고 있다. 그러니 외국에 나가 유창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인재들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유창한 영어=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이라는 공식이 생겼다. 영어 발음으로 그 사람의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한국식 발음의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기도 힘들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여기서 잠깐. 유창한 발음의 ‘영어 공화국’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한국인일까, 외국인일까. 당연히 한국인, 한국 기업들이다.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려면 유창한 발음이 필요할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런데 외국인들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관심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 사람이 클리포드 나스 스탠퍼드대 교수다. 그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고안했다. 실험 대상자들이 한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물건을 구매하게 했다.

실험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한 그룹의 실험대상자들은 판매자의 사진과 음성이 어울리는 상품홍보를 보고 구매했다. 예를 들어 백인 남성 판매자는 영어 원어민의 전형적인 억양으로 원어민 특유의 표현을 썼으며, 다른 판매자인 한국 남성은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 발음으로 한국 특유의 표현을 섞어서 말했다. 실험대상자들은 홍보음성을 듣고 나서 상품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홍보 내용은 얼마나 믿을 만했는지 등에 대해 설문을 작성했다. 두번째 그룹의 실험대상자들에게는 판매자의 사진과 홍보 음성의 연결이 달랐다. 즉 백인 남성의 사진에 한국식 억양의 음성을 연결하고, 한국 남성에게 원어민의 음성을 연결했다. 이 그룹에서 쇼핑을 한 실험대상자들도 실험이 끝난 뒤 설문에 응답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영어 공화국’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사진이 어떻든 원어민 발음이 한국식 발음보다 더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실험대상자들의 판단은 달랐다. 그들은 한국 억양을 쓰는 한국계 판매자나 원어민 억양을 쓰는 백인 판매자의 상품을 선호했으며, 상품 홍보 내용에 대한 신뢰도도 높았다. 영어 공화국에서는 납득이 안 가는 결과다. 왜 영어식 발음을 못 하는 사람에게 더 호감을 가질까. 분명히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판단을 할 때는 이성적인 판단과 정서적인 판단이 함께 이뤄진다.

사람들이 가진 외모나 억양은 자력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정서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니 정서적으로 제시되는 두 가지 단서가 서로 모순되면 그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는 것이 나스 교수의 설명이다. 이런 식으로 외모와 억양이 어울리지 않거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부감을 갖는다. 왠지 속을지도 모른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토속적인 한국 억양을 갖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한국인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 받는 인물 중의 한 분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 반 총장이 처음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했을 때 많은 한국인들이 들떴다. 유엔에서 한국인이, 그것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다니 한국의 위상을 크게 높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은 반 총장의 취임식을 기대에 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반 총장이 취임연설을 시작했을 때 아마도 영어 공화국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분의 발음은 유창한 원어민 발음이 아닌 토속 한국식 발음이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인사담당자들도 이 결과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외국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유창한 발음이 아니라, 내용을 알아듣고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외국어 발음이 그 사람의 외국어 판단의 기준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계평 <세계경영연구원(IGM)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