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가게에서 옷을 배달하던 15세 소년은 가게에 불만이 많았다. 자신이라면 복잡한 유통과정을 생략해 더 빠르고 더 값싸게 옷을 팔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27세에 자신의 옷가게를 처음 연 소년은 이런 생각을 구체화시켰다. 40여년 뒤 그는 세계 80개국에 약 5600개 매장을 둔 세계 최대 패스트패션(제조·직매형 의류) 업체를 일궜다. 패션브랜드 ‘자라(ZARA)’로 유명한 스페인 의류업체 인디텍스그룹의 창업주 아만시오 오르테가 회장(76) 얘기다.

인디텍스는 자라를 비롯해 풀앤드베어, 오이쇼 등 8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직원이 11만여명, 디자이너만 600여명에 달한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오르테가 회장은 업계의 상식을 뒤집는 과감한 역발상으로 회사를 키워 스페인 최고이자 세계 5위의 부자가 됐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2012년 기준)에 따르면 그의 재산 규모는 375억달러(약 41조4400억원)에 이른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최근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의 유일한 안전자산은 인디텍스”라고 평가했다.

○“속도가 생명, 단지 유행을 따를 뿐”

가난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난 오르테가 회장은 13세 때인 1949년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옷가게 점원으로 취직했다. 점원 생활을 하면서 원단 구매와 완성품 옷 판매 과정에 중개상이 포함된 탓에 제작기간과 비용이 늘어난다는 점을 간파했다. 1963년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오르테가는 중개상을 거치지 않고 원단업자에게 직접 소재를 구입,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유통과정 일부를 생략해 단가를 낮추고, 제품 회전주기를 줄이는 패스트패션 전략의 시작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신제품도 빨리 나오자 그의 가게는 인기를 끌었다. 오르테가 회장은 1975년 자신의 옷가게 브랜드를 ‘자라’로 바꾸고 1979년까지 스페인 내 매장을 6개로 늘렸다. 1988년부터는 포르투갈 미국 프랑스에 잇따라 진출했다.

그의 경영방침 중 핵심은 ‘속도 제일주의’다. 그는 “우리는 유행을 만들기 보다는 유행을 따라간다”고 말한다. 오르테가 회장은 자라의 해외 진출이 시작되면서 디자인 제조 유통을 담당하는 자회사를 각각 설립했다. 외주 제작과정을 거치면서 생길 수 있는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다. 자라가 신상품을 디자인해서 세계 각국의 매장까지 배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주일에 불과하다. 다른 의류 업체들은 최장 6개월까지 소요된다.

오르테가의 속도 제일주의는 자라의 비즈니스 모델인 다품종 소량 생산 시스템에도 반영돼 있다. 유행을 예측해 옷을 만들어 놓으면 재고가 쌓이고, 유행의 변화에 순발력 있게 반영할 수 없다는 게 오르테가의 지론이다. 특정 디자인과 소재가 유행할 때 최대한 많이 판매한다는 것이다.

자라는 평균 2주일에 한 번씩 매장 물건의 70%를 교체한다. 연간 1만1000여종의 옷을 선보이고, 아무리 길어도 4주일 이상 매장에 두는 제품이 없다.

빠른 변화는 고객들의 구매욕을 자극한다. 맘에 드는 옷을 즉각 구매하지 않으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매장의 옷이 자주 바뀌다 보니 고객들이 매장을 찾는 횟수도 잦아지는 효과가 있다. 인디텍스의 자체 조사 결과 고객들이 자라 매장에 들르는 횟수는 평균 1년에 17번이었다. 경쟁사의 6배가 넘는다. 루이비통모에헤네시의 패션 총괄 책임자 대니얼 피에트는 “자라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패션업계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평가했다.

○“역발상으로 승부, 일은 꼼꼼하게”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아시아나 심지어 아프리카 지역까지 공장을 옮기는 경쟁업체와는 달리 오르테가 회장은 인디텍스 제품들의 스페인 내 생산을 고집해왔다. 인디텍스 공장들은 스페인이나 인접 국가인 모로코에서 제품을 생산한다. 스페인 공장에서 나오는 인디텍스 제품 비중은 전체 제품의 65%를 차지한다. 인건비를 줄이는 것보다 공정 통합, 유통과정 단순화, 효율적 재고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지론에서다.

오르테가는 빠른 제품 배송을 통해 인건비를 줄이는 역발상 전략을 택했다. 물류를 완전 자동화하기 위해 1990년 중반 스페인에 축구장 90개를 합친 넓이 정도의 대형 물류기지를 만들었다. 또 세계 어디든 제품 배송에 걸리는 시간을 48시간 이내로 줄였다.

패션업체 경영자 답지 않게 광고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다. ‘광고는 옷 값을 부풀릴 뿐’이라는 것이다. 인디텍스가 새 점포를 내거나 새로운 제품을 출시할 때 신경쓰는 것은 새 점포의 입지 조건과 제품 전시형태뿐이다. 패션 잡지회사에 옷 샘플을 보내 주는 일도 없고, 제품 광고를 찍는 일도 없다. 인디텍스의 총 비용 가운데 마케팅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0.4%에 불과하다.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지만 업무처리는 지극히 치밀하다. 오르테가 회장이 선호하는 인재는 아이디어보다는 실무에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제품의 디자인 단계에서 소재 선정, 심지어는 단추 모양이나 재질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고객이 옷을 사는 환경을 감안, 디자이너실과 의류 생산실의 조명 채도는 매장 내 조명과 동일하게 유지하도록 했다.

포브스는 “직원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며 “그는 직원들이 힘들어 하는 부분과 윗사람이 직원들에게 어떻게 해야 직원들이 즐겁게 일하는지 등을 꿰뚫고 있다”고 평가했다.

○‘은둔형 경영자’

오르테가 회장은 좀처럼 언론이나 대중에 노출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최고 부자가 길을 걸어가도 스페인 사람들이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다. 그는 1990년 이후 자신의 사진을 단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다.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사진은 그가 구단주로 있는 스페인 프로축구 구단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의 경기를 일반석에서 관람하는 사진 정도다.

주주총회는 물론 사교모임에도 나가지 않는다. 작년 7월 차기 경영자로 부회장인 파블로 이슬라를 지명하고, 자신의 딸인 마르타 오르테가에게 경영수업을 시킨 뒤 기업을 물려주겠다고 후계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언론 인터뷰도 줄곧 거절하고 있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고 사업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한 것이 인디텍스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진단했다.

지인들에 따르면 그의 ‘은둔’은 평범하게 살고 싶은 욕구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인디텍스그룹의 성공이 자신의 탁월한 경영능력 덕분이라고만 비쳐지는 것을 매우 경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노력과 헌신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고, 나도 그중 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르테가 회장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새로운 수익원을 확보하기 위해 최근 인터넷 영업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위해 변호사 출신의 경영자를 영입하고, 판촉용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에 1000만명의 팔로어가 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