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영 이야기. 그건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있어 무장공비는 물론 호랑이도 통째로 잡아봤던 온갖 무용담이 난무하는 이야기보따리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항아리가 아닐까. 전역할 때는 기억조차 하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그 시절을 두고두고 회상하며 무궁무진하게 솟아나는 이야깃거리들을 보면 그만큼 우리 생활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릴 적, 큰형님이 입대하던 때였다. 입대하던 날, 그리고 얼마 지나 훈련소에서 옷가지가 우편으로 돌아오던 날, 부모님이 통곡하시던 모습을 보고 우리 형이 군에 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시절이 월남 파병 시절이었고 이웃 형이 한줌 재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으니 더 그랬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입대하던 날 어머님은 “형들 보니 군대 가는 건 엄마 품을 떠나는 거더라. 그게 좀 섭섭하지만 모쪼록 군생활 건강히 잘 하거라”며 애써 덤덤해하셨다. 좀 서운하기도 한 마음에 부모님 살아계실 때 난 주워온 자식이냐고 일부러 응석 겸 투정을 부리며 자주 웃었다.


2년 동안 학군훈련을 거쳐 1979년 ROTC 17기 소위로 임관하고, 4개월의 보병학교를 마친 후, 강원도 한 보병부대에 배치됐다.

무장공비가 침투해 낮밤으로 수색과 매복을 반복하는 초긴장 속에 소진된 체력과 공포의 추위를 겪어야 했던 수색작전, 결국 동료가 공비 한 명을 사살했지만 중대 전우도 전사하게 된 안타까웠던 경험. 소대원들이 무릎 꿇고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교만한 지식과 살아 있는 교육을 명분으로 겁도 없이 불발된 81㎜ 고폭탄을 자신만만하게 분해했던 무모함.

영하 30도, 체감온도 영하 60도의 한파 경보 속 동계훈련. 얼마나 추웠던지 소양강 한가운데 유속 때문에 얼지 않는 물줄기 양 옆에 전 중대원이 나란히 서서 냉수마찰을 해도 얼음이 깨지지 않던 지독한 추위였다.

잠 한숨 자지 않고 주먹밥을 가슴에 품은 채 꼬박 30여 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야 하는 ‘완전군장 100㎞ 행군’ 등 모두가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크고 작은 병영생활들. 걸어도 병사들보다 더 걸어야 했고, 잠을 자도 덜 자야 했던 소대장 시절은 장교의 책무를 외우고 전투수칙을 복창하면서 책임감과 리더십, 경영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습득할 수 있었던 나 자신에게는 아주 소중한 군생활이었다.

산이라면 신물이 났을 법도 하지만 은행 지역 본부장 시절 매월 음력 보름날이면 어김없이 100명 남짓한 직원들과 함께 1187고지 무등산 야간 산행을 해왔으니, 군생활 중 야간 산악행군과 야간 사격의 DNA가 아직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계절 따라 달라지는 달밤에 힘든 동료를 끌어주고 얘기를 나누며 5시간 정도 땀 흘려 산행하다 보면 어느새 저절로 팀워크와 동료애가 끈끈해진다.

모름지기 조직의 성과는 걸출한 개인이 만드는 게 아니라 조직원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굳게 뭉친 팀워크에서 나오는 법’이라는 걸 경영철학으로 갖고 있다. 조직생활의 중요한 덕목이 개인의 욕구를 자제하고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 협동해야 하는 것인 바,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회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몸으로 그걸 배우는 곳. 그곳이 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