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국민건강증진기금 예산 2조원 가운데 70%에 달하는 1조4500억원가량은 당초 기금 조성 목적에 맞지 않는 엉뚱한 사업에 배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증진기금은 흡연자 건강관리, 질병 예방, 국민 영양관리 등 ‘건강증진 사업’을 위해 조성된 기금으로 담배 한 갑당 354원씩 붙는 담배부담금이 주요 수입원이다.

28일 국회예산정책처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 9월 말 국회에 제출한 내년 건강증진기금 예산 2조747억원 가운데 본업인 건강증진 사업에 배정된 예산은 29.8%인 6187억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본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건강보험 가입자 지원(1조198억원·49.2%)과 질환극복기술 개발, 첨단 의료기술 개발 등 9개 연구·개발(R&D) 사업(2590억원·12.5%)에 배정됐고 일부는 보건분야 정보화 사업 등에 흘러가는 것으로 파악됐다. 배(본업)보다 배꼽(부업)이 더 큰 셈이다.

건보 가입자 지원이나 R&D 사업 등은 얼핏 보면 ‘건강증진 사업’과 비슷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국민건강증진법이 정한 기금 사용처와는 거리가 있다는 게 예산정책처의 지적이다. 법에 따르면 기금 사용처는 △금연 교육·광고 등 흡연자를 위한 건강관리 사업 △건강생활 지원 △보건교육과 자료 개발 △질병 예방·검진·관리와 암 치료 △국민 영양관리 △구강건강 관리 등으로 규정돼 있다는 것이다.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건보가입자 지원이나 R&D 사업, 정보화 사업 등은 담배 부담금 부과 취지와 맞지 않다”며 “정부가 따로 예산을 편성해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금 설립 목적에 맞지 않게 함부로 돈을 꺼내써선 안된다는 것이다.

예산정책처는 특히 건강증진기금이 각종 부업에 동원되면서 재정 건전성이 나빠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건강증진기금은 지난해부터 지출이 수입을 초과, 다른 정부 기금(공공자금관리기금)에서 빚을 끌어다 쓰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해 700억원이던 차입금은 올해 2200억원으로 증가했고 내년에는 3386억원으로 올해보다 53.9%나 늘어난다. 이에 따른 이자부담액도 지난해 13억원에서 올해 85억원에 이어 내년에는 193억원으로 급증한다.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기금 목적에 맞지 않는 사업을 하느라 엄청난 부실 위험에 노출돼 있는 상황”이라며 “운영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이자 부담 때문에 본업인 건강증진 사업이 위축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건강증진기금이 이처럼 설립 목적과 달리 동원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5년 담뱃값 인상을 계기로 담배부담금이 150원에서 354원으로 오른 이후 매년 반복되고 있다. 정부가 다른 예산이 빠듯하다는 이유로 기금에 계속 손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R&D 사업 등 기금 설립 목적에 맞지 않는 일부 사업은 별도 예산으로 편성해달라고 기획재정부에 요구해왔지만 그때마다 재정부는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시했다”고 해명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