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권국가로서 통치권을 행사할 권한이 있으며, 어떤 외부의 위협이나 압력에도 절대 굴하지 않을 것이다.”

9월26일 미국 뉴욕의 유엔총회장. 연단에 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위협과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지목된 곳은 국제통화기금(IMF)이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말만 들으면 아르헨티나가 심각한 주권침해를 당한 것 같지만 사실 IMF의 요구는 간단했다. 인플레이션과 성장률을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통계자료를 달라는 것뿐이었다. 자료를 요청한 지 1년이나 지났지만 아르헨티나는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았다. 참다 못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오는 12월17일까지 자료를 주지 않으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하자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유엔총회장에서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달 31일 아르헨티나의 신용등급을 ‘B’에서 ‘B-’로 강등했다. 투자적격보다 6단계나 아래다. 전망도 ‘부정적’으로 제시했다. 지나친 보호주의로 경제가 악화되면서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 S&P의 설명이다.

◆‘막가파식’ 경제정책

지난해 10월 재선에 성공한 뒤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보이고 있는 경제정책 행보는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지난 5월 자국에 진출한 스페인 석유기업 YPF를 강제 국유화한 건 ‘애교’ 수준이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경제 전망이 나빠진 후 달러 유출이 심해지자 환전을 원칙적으로 금지해 버렸다. 아르헨티나 국민이 해외여행을 하려면 정부에 여행사유 등을 일일이 신고해야 한다. 정부는 환전 신청 중 약 80%를 거절하고 있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겠다며 대대적인 수입 규제도 도입했다. 아르헨티나에 물건을 수출하려면 건별로 사전에 신고해야 한다. 아르헨티나 내에서 단 하나라도 생산되는 물품이면 수입이 금지된다. 또 외국기업이 아르헨티나에 물건을 팔면 반드시 비슷한 금액만큼 사가야 한다.

이 같은 일방통행식 보호주의 정책은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 환전 규제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져 달러 반출은 오히려 늘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추산으로도 올해 210억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암시장에서는 공식 환율보다 40% 이상 비싼 값에 달러가 거래되고 있다.

부동산 거래도 급감했다. 아르헨티나에선 불안한 자국 통화 대신 달러로 부동산을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2008년까지 월평균 5000건이었던 거래 건수는 올 들어 3600건 수준으로 떨어졌다.

자국 기업을 보호하겠다며 도입한 수입규제는 오히려 산업을 무너뜨리고 있다. 아르헨티나 제조업체 중 상당수는 재가공 또는 조립업체인데 원자재가 수입되지 않으니 공장을 돌릴 수 없게 됐다. 올 들어 공장 밀집지역인 티에라델푸에고에선 4000개가 넘는 일자리가 없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물가다. 수입이 안 되고 제조업도 안 돌아가니 곳곳에서 생활필수품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자연히 물가도 폭등했다. 민간기관들이 추정하는 물가상승률은 25~30%에 달한다.

◆극심한 포퓰리즘

경제가 어려워지자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락세다. 지난해 10월 당선 당시 54%였던 지지율은 24%까지 내려갔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지지율 회복을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우선 민간 경제기관의 통계조사 발표를 금지했다. 정부는 조작된 것으로 의심되는 경제지표를 내놓고 있다. 최저생계비 미만 가구 비율인 빈곤율은 정부 발표로는 6.5%에 불과하지만 전문가들은 37%로 추산한다.

포퓰리즘 성격의 복지 예산은 점점 늘리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113억7700만페소(약 28억달러) 늘리면서 이 중 대부분을 에너지 분야 보조금으로 쓰기로 했다. 부족한 예산은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면 중앙은행이나 연금공단이 사는 식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

젊은 층 표를 끌어오기 위해 투표연령을 18세에서 16세로 낮추는 법안도 1일 최종 통과시켰다.

◆역설적인 ‘자원의 축복’

어떻게 이런 비상식적인 정책이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서구사회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뿌리깊은 불신을 정치인들이 교묘하게 이용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2001년 아르헨티나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IMF는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했다. 이때 정치인들은 “IMF가 국민들을 힘들게 한다”고 선동했다. 2003년 국제 석유가격이 상승하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도 나아졌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남편인 니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은 2003년 취임하며 강력한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세바스티안 에드워드 미국 UCLA 앤더슨경영대학원 교수는 “정치인들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상당수 아르헨티나 국민 머리 속엔 ‘서구는 나쁘고 좌파정부는 좋다’는 이분법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풍부한 자원이 포퓰리즘을 가능케 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뒤죽박죽인 경제정책에도 올해 아르헨티나는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가뭄으로 곡물값이 폭등하면서 주요 수출품인 대두(콩)에서 얻는 이익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 25년간 거주했던 양호임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석유나 셰일가스 등 천연자원은 개발 안된 것을 합하면 브라질이나 미국보다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워낙 자원이 풍부해 예산을 낭비해도 국가 경제가 버텨 준다는 얘기다. 돈이 부족하면 외국 석유회사를 국영화하거나 자원개발권을 팔면 된다. 양 변호사는 “어쨌든 빈민층 입장에선 페르난데스는 좋은 대통령”이라며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에서 4선에 성공해 남미의 좌경화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