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한 항공기 제작업체인 한국항공우주(KAI)의 본입찰이 불과 20여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시장의 시선이 몰리고 있다.

민영화를 반대하는 KAI 노조의 실사 진행 방해에 이어 대한항공의 인수 부적격 논란도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2차 마감 직전 급작스럽게 예비입찰서를 제출한 현대중공업의 인수 의지 여부를 둘러싸고 현대중공업의 일명 '들러리 입찰' 가능성에 대한 의혹도 끊이지 않고 있다.

◆ KAI 노조, 예비 실사 저지 투쟁…"민영화 반대"

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5일부터 KAI에 대한 예비실사를 진행하고 있는 대한항공과 현대중공업은 최근 산업은행에 매각 일정을 늦춰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KAI 노조의 방해 활동으로 예비 실사 진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것.

KAI노조는 지난달 30일부터 현대중공업과 대한항공의 예비 실사 담당자들이 실사에 필요한 문서를 열람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서울 중구 중림동에 있는 KAI 서울 사무소에 보안 직원이 출근을 못 하도록 막고 있다. KAI는 방위산업체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보안 담당자가 없으면 문서를 열람할 수 없다.

KAI 노조 측은 총 6가지 항목을 들어 매각 주체에 대한 요구사항을 산업은행에 전달한 바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산업은행이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않고 매각을 진행하고 있어 예비 실사 저지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KAI 노조는 과도한 부채비율 및 부채보유 기업의 인수참여 제한 및 채증적인 감점제 도입, 일정비율 이상의 부채비율 보유 시 입찰대표자로서의 입찰참여 배제를 주장하면서 부실자본, 투기자본의 인수참여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 방위 산업의 공공성 확보 △ 기업발전 비전의 제시 △ 기업발전 비전의 제시 △ 전 직원의 고용보장과 매각 성과배분 △ 전 직원의 당사자로서의 참여 보장 등을 요구사항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중 과도한 부채비율을 들면서 입찰 참여를 주장한 부분은 재무 구조 리스크를 안고 있는 대한항공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KAI 노조 관계자는 "부채비율이 높고 재무 구조가 부실한 기업이 KAI를 인수할 경우 국가 기간 산업인 항공우주산업 자체의 붕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 현대重, 인수의지 논란…대한항공 실사 인원 30여명 vs 현대重 3명?

현대중공업은 2차 입찰 마감 시한인 지난 9월 27일 돌연 예비입찰서를 내놨다. 8월말 1차 입찰 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가 2차 연장 입찰 마감일에 인수 결심을 한 것이다. 당시 대한항공 이외에는 관심을 표명한 기업이 없던 상태라 현대중공업의 인수전 참여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이에 현대중공업이 정부의 요청으로 KAI 매각이 수의 계약으로 결론나지 않도록 인수전에 들어온 것이라는 루머가 KAI 안팎에서 끊이지 않았다. KAI는 정부 소유로 국가계약법상 국유재산 등을 매각할 때 반드시 두 곳 이상 기업이 참여해 유효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 또 두 차례 공개 입찰이 무산되면 수의계약 방식으로 매각이 진행된다.

현재 예비 실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대한항공은 30여명의 대규모 실사 인원을 직접 투입해 강력한 인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반면 현대중공업은 2~3명에게 실사 책임을 맡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이미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 인수전 등에서 실사 중 중도 포기한 전과가 있어 이번 KAI 인수전에서도현대중공업이 중도에 인수를 포기하거나 고의로 매각 가격을 낮게 써내 결국 대한항공 인수를 돕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은 공식적인 답변을 통해 들러리론에 대해 부인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실제로 구성된 실사단의 인원은 50명"이라며 "2~3명이 실사 현장에 있었던 때는 KAI 노조 인력이 실사 저지를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한 때"라고 해명했다. 현대중공업은 KAI 실사에 대한 외부 자문사로 외국계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를 선정해 실사 자문을 받고 있다.

이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매우 신중하게 인수 여부를 타진하고 있다"며 "탄탄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그룹의 신성장 동력으로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M&A 전문가 "실사단 규모 인수 의지와는 무관…오히려 강력한 인수 의지"

M&A 전문가들은 그러나 "사실상 실사단의 규모는 인수 기업의 의지와 무관하다"라고 입을 모았다. 오히려 대한항공 실사단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M&A 전문가는 "KAI는 삼일회계법인이 감사인인 데다가 방위사업 관련해서 여러 번 중복 감사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라며 "재무제표상 허위 오류 등이 발견되기 어려운 것은 상식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문가는 "실사단은 인수 시 기업 가치 등만 따져보면 될 것"이라며 "실사단 규모는 기업의 인수 의지와 무관하다"고 덧붙였다. 실사의 방법에는 실제 현장 실사, 각종 서류심사 등 여러가지 방식이 있으며 현대중공업그룹은 이전부터 그룹의 특성장 많지 않은 인력으로 실사단을 꾸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는 전언이다.

한 외국계 증권사 M&A 담당자도 "실사단의 규모와 실사 시기 등은 매수 희망자와 매도자 사이에서 결정하는 일"이라며 "M&A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인수 의지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현대중공업이 고도의 전략적인 접근을 통해 KAI 인수를 시도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통상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매물을 매각할 경우 헐값 매각 등 특혜 시비가 항상 발생하는데 이번 KAI 매각에서는 대한항공이 그 부분을 전부 떠안고 있다는 것. 현대중공업 입장에서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인수 이익을 챙기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번 딜(deal)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의 경우 이미 KAI와 항공우주산업 전반에 걸쳐 긴 시간 동안 스터디를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인수 의지만 놓고 보면 현대중공업 역시 대한항공 못지 않다"라고 귀띔했다.

◆ 지역사회·여의도 증권가의 가상 대결…현대重 '한판승'

경남 사천에 공장을 두고 있는 KAI의 경우 지역사회의 분위기나 인수 후보 기업의 재무 구조 등을 봤을 때 실제 매각이 성사된다면 대한항공 보다는 현대중공업이 인수자로 적격하다는 판단이다.

울산에 공장을 두고 있는 현대중공업이 탄탄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KAI를 인수하게 될 경우 거부감이 덜 하다는 것이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설명이다. KAI 노조 측도 실제로 매각이 진행될 경우 대한항공 보다는 현대중공업의 인수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업 분석 임무를 맡고 있는 여의도 증권가(街) 애널리스트들은 KAI 인수전의 승자로 대부분 현대중공업을 꼽았다. 이들은 현대중공업의 역사적인 '정통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은 1999년 10월 삼성항공우주산업, 대우중공업, 현대우주항공 3사의 항공사업 부문을 통합해 설립된 곳이다. 이에 현대우주항공의 부활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 현대우주항공의 지분은 한국항공우주 통합 이후 현대차의 보유 지분(10.0%)으로 이어졌다.

또 현대중공업의 이번 입찰 참여가 일본 조선업체의 사업 다각화와 맥을 같이 한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상우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는 "현대중공업이 일본 중공업체와 유사한 성장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우주·항공기 관련 역량이 제외된 점이 일본중공업체인 미츠비시중공업, IHI, 가와사키중공업과의 차별점"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한국항공우주가 경업금지(경쟁업종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를 통해 국내 항공사업을 독점하고 있어 사업진입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이번 입찰에서 현대중공업이 최종 인수자로 선정될 경우 국내 항공기 제작 사업에 성공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그는 "현대중공업은 이미 나로호 발사대 제작을 통해 우주 관련 사업에 첫발을 디딘 상태"라며 "향후 기업의 성장을 조선·해양을 기반으로 한 종합중공업체가 될 것이며 그 모델은 일본의 미츠비시중공업, 가와사키중공업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경닷컴 최성남 기자 sul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