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가까이 재판 중인 신한은행 전 임원진의 횡령 등 의혹 사건과 관련해 재판 증인으로 채택된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알츠하이머병을 이유로 증인 출석을 거부했다. 재판 과정에서 라 전 회장이 이상득 전 의원에게 억대 금품 전달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라 전 회장의 증인 출석 여부가 관심을 모아 왔다.

신한은행 사건을 심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설범식)는 14일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된 라 전 회장이 12일 신고서 제출을 통해 불출석 의향을 밝혔다”며 “라 전 회장이 신한은행 사건에 따른 충격으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치료중이라는 게 불출석 사유”라고 밝혔다. 라 전 회장이 앓고 있다는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를 일으키는 뇌질환으로, 라 전 회장은 ‘병으로 과거 일을 기억할 수 없어 증언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라 전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한 검찰은 재소환 여부에 대해 “대리인을 통해 시도해 보겠다”고 답했다. 검찰은 지난달 26일 재판에서 라 전 회장을 증인으로 세울 계획이었으나 소환 통보 지연으로 이미 한 차례 불발된 적이 있다.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신상훈 전 신한지주 사장 측은 “라 전 회장의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변호사를 통한 서면 제출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라 전 회장이 직접 법정에 나오길 바란다”는 의견을 냈다. 신 전 사장 측은 검찰의 태도를 비판하며 “다른 증인들의 경우처럼 검찰이 적극적으로 라 전 회장을 소환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알츠하이머는 갑자기 발병하는 병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라 전 회장이 법정에 나와 증언한다 해도 신빙성 문제에 대해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라 전 회장이 거부하는 한 증인으로 세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정당한 사유 없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일을 거부하는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구인장을 발부해 법원으로 데려오는 건 가능하다. 그러나 구인장을 발부한다 해도 소재가 불명확하면 집행할 수 없다.

신한은행 사건은 2010년 9월 신한은행이 신 전 사장을 검찰에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검찰 수사 후 신 전 사장은 고(故) 이희건 신한지주 명예회장에게 경영 자문료를 지급한다는 명목으로 회삿돈 15억여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은 이중 비자금 3억원을 빼돌려 사용한 혐의로 함께 기소됐다.

라 전 회장은 당시 ‘신한은행 3인방’ 중 유일하게 기소를 면했으나, 재판 과정에서 라 전 회장이 명예회장의 자문료 명목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이중 3억원을 이 전 의원에게 주는 데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간 법정에서 공방이 벌어져 왔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