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중국 공산당 입당을 열 번이나 거절당했던 청년이 입당 38년 만에 당 최고지도자가 된다. 15일 중국 공산당 총서기(임기 5년·연임관례화)에 오르는 시진핑(習近平) 국가 부주석은 중국 태자당(공산혁명가의 자제들) 그룹의 황태자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는 자오쯔양(趙紫陽)과 당 총서기 자리를 다퉜던 거물이다. 시진핑은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삶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친의 몰락과 강제노역 등 호된 시련도 겪었다. 그가 온갖 고난을 딪고 13억 중국인의 최고지도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생을 바꾼 5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1. 류즈단 숙청 - 반동의 자식 '낙인' 농촌 추방…10전11기 끝에 공산당 입당

“시진핑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절반은 밝았지만 절반은 어두웠다.” 중국 공산당이 발행하는 잡지 ‘중화자녀’는 그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실제로 유복한 소년 시진핑은 9세 때 ‘소설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부친이 숙청되면서 반동의 자식으로 전락했다.

‘류즈단’은 혁명전사이자 시중쉰의 전우였던 류즈단의 생애를 묘사한 소설이다. 소설에 이미 숙청된 가오강(高岡)이란 인물이 시중쉰과 함께 등장해 홍군을 구하는 내용이 문제가 됐다. 당국은 “소설을 이용해 반당 활동을 했다”며 시중쉰을 해임했다. 주변의 냉대를 받게 된 시진핑은 하향(下鄕·지식인의 농촌체험) 활동을 지원해 산시(陝西)성 옌촨(延川)현의 산골마을로 갔다. 황토고원의 동굴 움막에서 7년을 살면서 강제노역을 했다. 너무 힘들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10전11기 끝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1975년 공산당 추천으로 칭화대 입학을 허가받아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진핑은 “하향 생활을 통해 민중을 이해하고 인생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2. 관료로 변신 - 군사위 비서장의 비서 사임…北京서 지방으로 자원근무

1982년은 시진핑에게 관료 생활의 전환점이 된 해다. 군복을 벗고 지방으로 내려간 것이다.

1979년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겅뱌오(耿飇)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비서가 됐다. 복권된 부친의 배경 덕분이었다. 그러나 3년 후 그는 지방 근무를 자청,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시골마을로 갔다. 그해 중앙기관에서 지방 근무를 자원한 사람은 시진핑과 류위안(劉源) 군 정치위원 등 3명뿐이었다. 문화혁명을 겪은 젊은이들에게 농촌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베이징에서 50㎞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에 비애를 느꼈다”며 “당시는 농촌의 여건이 문화혁명 때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에 더욱 분투하기 위해 내려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지방으로 간 지 얼마 안 돼 겅뱌오가 좌천됐다. 그래서 시진핑이 겅뱌오의 정치적 운명을 간파하고 지방으로 갔다는 얘기도 나온다. 공산당은 이후 젊은 지도자 후보군을 선발할 때 지방에서 고생한 간부들을 우선시하는 전통을 만들어갔고 이는 시진핑에게 큰 힘이 됐다.

3. 부친의 복권 - 시중쉰, 1978년 정치적 복권…부친 후광으로 베이징 컴백

시중쉰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1978년 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에 선출돼 중앙 정치무대로 돌아왔다. 이후 광둥성 서기, 국무원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시진핑의 최대 후원자 역할을 했다.

1999년 10월1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열린 건국 50주년 기념식에 시진핑은 부친과 나란히 참석했다. 그는 푸젠(福建)성 대리성장에 불과했지만 당 원로인 부친의 수행원 자격으로 행사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시중쉰은 베이징에서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 주석,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 원바자오(溫家寶) 총리, 자칭린(賈慶林) 상무위원 등의 예방을 받았다.

이때 시진핑은 중앙무대의 정치거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었다. 시중쉰은 2002년 사망해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 혁명묘지에 묻혔다.

4. 위안화 사건 - 中 역사상 최대 부패 스캔들…깔끔한 업무처리로 능력 인정

시진핑은 1985년부터 2002년까지 17년간 푸젠성에서 근무했다. 그가 푸젠성 부서기를 맡고 있던 1999년 4월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부패 스캔들이 푸젠성에서 터졌다. 위안화(遠華)그룹 창업자인 라이창싱(賴昌星)이 830억위안(약 14조5000억원) 규모의 밀수와 탈세를 한 사실이 적발됐다. 그가 푸젠성의 많은 관료들에게 뇌물을 건넨 사실도 드러났다.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00년 그는 푸젠성장이 됐다. 시진핑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사팀과 함께 위안화 사건을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 사건으로 300여명에 이르는 고위 관료가 처벌받았다. 천밍이(陣明義) 푸젠성 서기도 아내와 아들이 이 사건에 연루돼 해임됐다. 그러나 시진핑은 깨끗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홍콩의 ‘대공보’에 따르면 시진핑은 ‘곰발바닥과 생선은 함께 얻을 수 없다(魚和熊掌不能兼得)’는 맹자의 말을 신조로 삼았다. 정치를 하면서 돈은 벌지 않겠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5. 상하이 서기 - 장쩌민 심복, 부패 얽혀 경질…계파 갈등속 어부지리 발탁

시진핑은 리커창(李克强) 부총리와 벌이던 차세대 지도자 경쟁에서 뒤져 있었다. 그러나 2007년 3월 상하이시 서기로 전격 발탁되면서 승기를 잡았다. 2006년 9월 장쩌민 전 주석의 심복이던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가 부패 사건으로 경질되는 일이 발생했다. 후임자로는 리위안차오(李源潮) 류옌둥(劉延東) 등 공청단파 인물들이 거론됐다.

그러나 공청단파의 공세에 위협을 느낀 장쩌민은 태자당 좌장인 쩡칭훙(曾慶紅) 국가 부주석의 추천을 받아 시진핑을 낙점했다. 시진핑에 호감을 갖고 있던 후진타오도 결국 이를 수용했다. 그해 10월 후진타오는 직접 상하이를 방문해 시진핑을 격려했다.

시진핑은 그 다음달 열린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서열 5위의 국가 부주석에 발탁돼 차기 국가 주석직을 예약했다. 쩡칭훙이 시진핑을 차기 지도자로 천거하면서 각 계파에 한 말은 “그는 각 정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베이징=김태완 특파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