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현 익산)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김진호 소위는 지금 당장 복구 장비 챙겨서 출발 준비해.”

1977년 11월12일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는 학군장교(ROTC) 15기로 임관해 광주 육군전투병과교육사령부 건설공병단 소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준비하고 있던 그날 아침 대대장으로부터 긴급 출동명령을 받았다. 전날 저녁 9시15분께 전북 이리역 내 화물열차에 보관 중이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 그 일대가 엉망이 됐다는 설명이었다.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당한 ‘이리역 폭발사고’에 지원을 나가게 된 것이다.

도착한 이리역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역 앞에는 지름 30m, 깊이 10m에 달하는 거대한 웅덩이가 파였고, 집들은 모두 무너지고 길가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이 즐비했다. 급한 대로 시신들을 수습하는 한편 1만여명에 달하는 이재민과 복구반이 임시로 묵을 막사들을 짓기 시작했다.

쌀쌀한 초겨울 날씨에 장비는 부족했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을 보면서 힘을 냈다. 나도 직접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밤낮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한 달여를 이리에서 보냈다. 복구 작업에 참여하면서 대학에서 배운 토목공학이 그렇게 중요한지도 새삼 깨달았다. 1981~1986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와 제다의 건설현장에서 모래알을 씹으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날의 경험이 큰 힘이 됐다. 긴급 복구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한 아주머니가 고맙다며 손에 쥐어준 고구마를 받아들며 눈물을 훔치던 기억도 생생하다.

6개월가량 맡았던 기능공 직업 훈련원 교관 생활도 보람이 컸다. 토목기사1급 자격증을 갖고 있어 교관을 맡게 됐다. 전역을 앞둔 부사관과 장병들에게 기능공 자격증 취득 교육을 하는 일이었다. 용돈으로도 빠듯했던 중위 월급을 털어 서울서 문제집을 구해오고 훈련생들에게는 간식도 사줬다. 정성이 통했는지 내가 가르친 훈련생 40명 중 38명이 시험에 합격했고 덕분에 최우수 교관 표창도 받았다.

근무 중 권총을 분실해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당시 부대 장교들은 순번제로 야간에 위병초소에서 헌병 부사관과 함께 근무를 섰다. 일과시간 이외에 직업 훈련원 교관으로 하루 24시간이 바빴던 시절이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30분쯤 눈을 붙였을까. 무언가 허전하다는 생각에 허리춤을 보니 있어야 할 권총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예나 지금이나 총기 분실은 군에서는 중죄다. 바깥에 있던 헌병 부사관은 “모르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잡아뗐다.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위병초소를 서성였다. 그 순간 먼 발치에서 부대 당직 사령(대령)이 다가왔다. 바짝 긴장하던 내게 권총을 한 손에 들고서 웃음 띤 얼굴로 “김 중위 힘들다고 근무 중에 잠을 자면 되겠나. 내가 김 중위 정신 차리라고 권총만 슬쩍 가져왔지”라고 말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날 이후 야간 근무 때 졸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불안해 차고 있던 권총과 몸을 줄로 묶어 누가 쉽게 빼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줄이 너무 팽팽해 만약 눈앞에 갑자기 적이 나타나면 총도 제대로 쏘지 못 했을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난다.

1979년 전역 후 같은 해 한양에 입사, ‘건설밥’을 먹은 지 벌써 33년이 흘렀다. 2003년 한신공영 사장을 시작으로 현재의 대우산업개발까지 최고경영자(CEO)로 경영을 맡은 지도 10년째다. 군은 나에게 국가와 사회를 위한 희생정신과 조직을 추스르는 리더십, 그리고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는 치밀함을 일깨워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