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올림픽에서 일본 독일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5위 달성, 유럽 재정위기와 중국 인도 등 주요 개발도상국들의 경기 부진으로 세계 경제가 어수선한 와중에 국가신용등급 상승,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 인천 송도 유치 등 최근에 날아든 꽤 큼지막한 소식들을 우리는 비교적 담담하게 들었다. 왜 그럴까? 즐거워만 하기에는 경기침체의 중압감이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그 정도는 기본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해서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대통령 뽑기에 온 신경이 집중돼서일까?

최근 한·일, 중·일 간 영토분쟁으로 동북아 지역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미국이 1960년 미·일 간에 체결된 조약을 근거로 중국을 압박하고 나서자 중국은 제18차 당대회에서 ‘강한 군대로 해양강국을 건설하자’고 맞불을 놓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실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아직도 갈 길이 먼 한국’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릿고개’로 특징지워지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지만 태평양 건너에 있는 미국의 도움 없이는 주변의 어느 국가와도 군사력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수출 규모 세계 7위의 무역대국이기는 하나 수출의 중국 의존도가 높고, 핵심부품·소재를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일류제품 중에는 일본이 부품·소재 공급을 중단하면 생산을 멈춰야 하는 것이 적지 않다. 중국이 무역규제라도 하면 한국 경제는 중병을 앓는 게 불가피하다. 수출이 줄어들 뿐 아니라 전자제품에 필수요소인 희토류를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어떤가? 내우외환의 태풍전야에도 긴장감은 보이지 않고 승리만을 위한 대선공약이 공황에 가까운 후폭풍을 몰고 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의 경제적 위상은 크게 개선됐지만 국토방위 능력으로만 따져 보면 ‘20세기 초 대한제국’과 ‘21세기 초 대한민국’의 처지에는 차이가 없다. 역사를 들여다 보면 무력과 비례하지 않는 경제력이 화를 부른 경우가 있다. 로마가 지중해의 무역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던 카르타고 민족 전체를 지도에서 완전히 지운 것이 가장 극단적인 예다. 아무리 평화의 시대에 산다고 하지만 주변 국가와의 군사력 불균형은 늘 불안감이 따라 다닌다. 한국의 발전이 ‘자기만족의 완료형’일 수 없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진행형’이어야 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지만 주요 2개국(G2) 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접보다는 오히려 ‘일본 때리기’가 있었다. 일본이 2차대전 패전국가여서가 아니라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중국은 경제 2위국이 되자마자 G2 대접을 받고 있다. 넓고 넓은 중국시장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이 유인우주선 기술을 보유한 일류 과학기술국이자 전 세계를 타격권으로 하는 군사 초강국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두 이웃국가가 2등 자리를 주고 받고 세계 1위를 넘보는 가운데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딛고 잘 헤쳐온 한국 경제의 앞날이 어둡기만 하다. 세계경기 침체의 장기화, 가계부채 누적, 저출산 고령화와 같이 익히 알고 있는 문제도 있지만 치유가 쉽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해 있다. 갈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알 만한 사람들이 발목 잡는 목소리만 내고 있기 때문이다. 긴 안목으로 민족생존전략을 설계하고 추진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와 화합이 부족해 사회적 비용이 날로 눈덩이처럼 커지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가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50년간의 경제기적이 지나간 짧은 역사가 되느냐, 계속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 30년 동안 경제관료생활을 같이한 동료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렇다면 지금이 꼭대기 아니야? 이제 내려가는 길밖에 수가 없어.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정말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여기서 내려가기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의 피와 땀을 마주하기가 너무 부끄럽다.

최중경 < 헤리티지재단·객원연구위원 前 지식경제부 장관 choijk1956@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