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인생 40년 회고록 낸 김인섭 '법무법인 태평양'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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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법치주의 갈수록 악화…근현대 역사책도 내고싶어"
“판사 시절 남들에게 ‘트러블 메이커’라는 말도 들었지요. 원칙에 어긋나는 경우 지적하고 나섰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법과 원칙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습니다.”
회고록《추풍령에서 태평양까지》(나남)를 낸 법무법인 태평양의 창립자 김인섭 태평양 명예대표변호사(76·사진)는 회고록에서도, 14일 서울 역삼동 태평양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회고록 제목은 충북도 영동군 추풍령에서 태어나 판사를 거쳐 대형 로펌 태평양을 세우고 은퇴하기까지의 여정을 반영했다.
김 대표는 왜 트러블 메이커가 됐을까. 그는 회고록에서 새내기 판사 시절 중앙정보부 직원이 연루된 사건을 맡은 그에게 외부 압력이 들어왔으나 거부한 일, 1971년 1차 사법파동 당시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에서 대책회의를 주도한 일, 1970년대 중반 대법원장을 찾아가 법원행정처장 교체를 건의하며 사표투쟁을 벌인 일 등 17년여 동안의 판사 생활을 소개했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다 구속된 이명박 대통령(당시 대학생)과 생면부지 사이인데도 신원보증을 서준 일도 언급했다. 그러다 변호사로 나서 한국 최초로 국제변호사가 아닌 ‘토종’으로서 로펌(태평양)을 세워 활동했다.
김 대표는 현재 우리의 법치주의 수준에 대해 “과거 판사,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보다 지금 법치가 더 악화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법치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사회는 발전할 수 없고, 어느 정도까지 발전은 한다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는 선거 등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됐을지 몰라도, 법치주의가 동반되지 않은 민주화는 내실 있는 민주화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질서를 무시하는 일상 생활, 회기 내에 안건을 처리하지 않는 등 법을 어기는 국회 운영 등을 들었다.
김 대표는 또 다른 저서를 집필하고 있다. 그는 “아직 우리나라에 법치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역사 교육”이라며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을 내겠다”고 말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회고록《추풍령에서 태평양까지》(나남)를 낸 법무법인 태평양의 창립자 김인섭 태평양 명예대표변호사(76·사진)는 회고록에서도, 14일 서울 역삼동 태평양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회고록 제목은 충북도 영동군 추풍령에서 태어나 판사를 거쳐 대형 로펌 태평양을 세우고 은퇴하기까지의 여정을 반영했다.
김 대표는 왜 트러블 메이커가 됐을까. 그는 회고록에서 새내기 판사 시절 중앙정보부 직원이 연루된 사건을 맡은 그에게 외부 압력이 들어왔으나 거부한 일, 1971년 1차 사법파동 당시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에서 대책회의를 주도한 일, 1970년대 중반 대법원장을 찾아가 법원행정처장 교체를 건의하며 사표투쟁을 벌인 일 등 17년여 동안의 판사 생활을 소개했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다 구속된 이명박 대통령(당시 대학생)과 생면부지 사이인데도 신원보증을 서준 일도 언급했다. 그러다 변호사로 나서 한국 최초로 국제변호사가 아닌 ‘토종’으로서 로펌(태평양)을 세워 활동했다.
김 대표는 현재 우리의 법치주의 수준에 대해 “과거 판사,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보다 지금 법치가 더 악화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법치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사회는 발전할 수 없고, 어느 정도까지 발전은 한다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며 “우리는 선거 등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됐을지 몰라도, 법치주의가 동반되지 않은 민주화는 내실 있는 민주화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질서를 무시하는 일상 생활, 회기 내에 안건을 처리하지 않는 등 법을 어기는 국회 운영 등을 들었다.
김 대표는 또 다른 저서를 집필하고 있다. 그는 “아직 우리나라에 법치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역사 교육”이라며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을 내겠다”고 말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