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스토리의 보고예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지무지 많습니다. 역사가 파란만장했잖아요. 이들 이야기는 창의적 문화 콘텐츠의 원천이죠. 현대에 맞게 재창조한다면 훌륭한 소설, 드라마,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69·사진)가 ‘500년 조선 스토리’를 책으로 엮었다. 조선시대 필기·야담류, 문집류에서 발굴한 한문 단편 115편을 한글로 옮기고 평설(評說)을 달아 묶은 《한문서사의 영토》(태학사·전 2권)다. 1970년대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와 함께 펴낸《이조한문단편집》의 후속격이다. 18~19세기 작품에 집중한 《이조한문단편집》과 달리 15세기 말까지 대상 시기를 올려잡았다.

“요즘 시대와 감각적으로 통하면서도 내용에 의미가 있는 단편을 골라 담았어요. 이야기 속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그 시공간에서 의미를 갖고, 요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감명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책에는 별의별 이야기들이 많다. 매월당 김시습, 의적 임꺽정, 도술가 전우치, 토정 이지함 등의 이야기가 낯익다. 시대를 앞서간 황진이의 계약동거와 금강산 무전여행 이야기, 조국 멸망 후 조선에서 삶을 마친 명나라 궁녀 굴저의 스토리도 눈길을 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도 여러 편이다. ‘괴물 이근’이 눈에 띈다.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살아 돌아온 중증 장애인 이야기가 특이하면서도 애절하다. ‘임진피병록’은 병자호란 때 활 한 자루를 들고 잡혀간 여동생을 구하러 나서는 액션 영화 ‘최종병기 활’을 떠올리게 한다.

“‘임진피병록’은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문장 4대가로 꼽혔던 월사 이정귀가 자신의 경험담을 르포식으로 기록한 거예요. 부모와 아내를 지키기 위해 활 한 자루로 왜군과 싸우지요. 지금의 경기도 일산 쪽이 그 무대예요.”

왜군이 진입하기 직전 한양의 정황, 활을 쏠 줄 아는 피란민들로 민병대를 결성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과 싸우는 장면, 주인공의 부인이 왜군에게 붙잡히기 직전 절벽에서 뛰어내리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을 구하는 장면 등 ‘임진피병록’의 이야기 전개가 극적이고도 흥미진진하다.

조선 검객을 만나 혼이 난 뒤 조선의 승려가 된 사무라이의 이야기인 ‘검승전’이나 광대 박춘이 포로가 된 뒤 능력을 발휘해 왜군의 지휘관이 되는 ‘재인 박춘’ 이야기는 현대 전쟁 소설보다 더 기막히다. 임 교수는 “이들 이야기는 재미있는 읽을거리로서 문학의 원천이며 창조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무한한 좋은 재료”라고 평가했다.

20년 전 낸 《이조시대 서사시》의 증보편을 준비하고 있는 임 교수는 한국한문학회 회장, 한국고전문학회 회장,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 동아시아학술원장 등을 지냈다. 한문학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만해문학상, 단재상, 다산학술상 학술대상, 연세대 용재상 등을 받았다. 성균관대 명예교수로서 실학박물관 석좌교수를 겸하고 있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