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 이후 영업정지당한 21개 저축은행에서 발행한 후순위채에 투자한 사람은 1만7532명(5747억원)이다. 이 가운데 불완전 판매 피해자로 인정받아 투자금을 일부 건질 수 있는 사람은 5687명(1789억원) 정도다. 금융당국의 정책 실패와 감독 부실, 그리고 저축은행의 경영 실패로 수많은 금융소비자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저축은행 부실 사태는 금융정책과 감독, 그리고 금융회사의 경영 등 금융 패러다임이 ‘소비자 보호’로 전환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사실 금융소비자는 그동안 보호 대상이라기보다 수익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금융정책도 금융회사 건전성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젠 과거 행태로는 금융회사는 물론 금융당국도 신뢰받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시대로 금융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는 여전히 ‘약자’

소비자들이 똑똑해졌다고 하지만 금융회사와 소비자 간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는 여전하다. 금융당국이 대출금리와 연금저축 수익률 등에 대한 비교공시를 강화하는 것도 ‘금융회사=갑(甲)’, ‘소비자=을(乙)’이라는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의도다.

물론 이런 역학구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각종 정보가 온라인 등에 올라오는 것과 함께 권리 의식이 높아진 소비자들이 금융회사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라진 흐름은 금융감독원이 올해 세 차례 발령한 ‘소비자 경보’의 전파 속도에서도 확인된다.

금감원 금융소비자보호처는 지난 7월 이후 △카드 리볼빙 서비스 △해외여행시 원화결제 서비스 △즉시연금 절판 마케팅 등에 주의하라는 경보를 발령했다. 이 가운데 ‘카드 리볼빙 서비스’를 받으면 카드론 금리에 육박하는 고금리를 물어야 한다는 내용의 경보는 불과 며칠 만에 30여만명이 리트위트(트위터에서 다른 사람의 멘션을 다시 전파하는 것)했다. 내년부터 세제 혜택이 사라진다고 소비자들을 현혹해 즉시연금에 가입시키는 ‘절판 마케팅’에 대한 경보 역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급속하게 전파돼 금융회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소비자 권리 의식과 정보 접근성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금융상품 구조와 거래 형태가 더욱 복잡해지는 속도가 워낙 빠른 만큼 소비자가 이를 따라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소비자 보호에 대한 금융회사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관행? 못 고치면 평판 추락

올해 은행권에서는 과거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해왔던 관행들이 금융회사의 평판을 순식간에 추락시킨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학력에 따른 대출금리 차등 적용(신한은행)과 집단대출 서류 임의 변경(국민은행)은 금융회사의 편의주의적인 발상이 소비자들의 강력한 역풍을 불러오는 시대가 됐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신한은행은 새로운 개인신용평가 모델을 도입하면서 학력에 따라 13~54점을 차등 부과했다. 대학원 졸업자에게 54점 만점을, 고졸자에게는 13점의 점수를 주기로 한 것이다. 학력 점수가 전체(만점 875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도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과 소비자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한 연구기관에서 교육수준이 높으면 신용평점이 높다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지만 비판 여론을 잠재우긴 어려웠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다른 나라에서도 도입한 평가 모형을 선진적으로 적용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금융소비자의 정서를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했던 게 잘못이었다”고 말했다.

고객 편의를 이유로 아파트 집단대출 서류를 임의로 변경했던 국민은행 역시 지난 8월 홍역을 앓았다. 일부 지점에서 대출서류 임의 변경 사실이 드러난 이후 국민은행은 전 영업점에 대한 전수조사를 벌여 9600여건의 사례를 적발해 스스로 공개하기까지 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고객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 죄의식 없이 관행적으로 대출서류를 변경했던 직원들과 경영진에 큰 경종을 울렸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이 사건 이후 금융소비자보호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소비자도 달라져야

소비자 보호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소비자들이 달라져야 한다는 주장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금융 민원이 급증한 데는 소비자들의 권리 의식이 높아진 탓도 있지만 최근 금융권에 대한 비판 여론을 틈타 부당한 요구를 하는 ‘블랙컨슈머’ 증가도 한몫했다는 게 금융사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일부 소비자가 ‘모집수당을 나눠 갖자’고 제안하는 사례까지 보험업계에서 포착되고 있다. 월 100만원짜리 변액보험에 가입할 테니 모집수당 400만원을 절반씩 나누자는 식인데, 이는 명백한 불법이다. 부가서비스 축소에 나서고 있는 카드사들도 “다른 사람은 줄이더라도 나만은 줄이지 말라”는 일부 고객의 ‘생떼’에 시달리고 있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