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정권 수립 후 중국 권력의 역사는 크게 두 번의 30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마오쩌둥의 30년이다. 그는 1949년 건국 후 1976년 죽을 때까지 근 30년간 1인 철권체제를 유지했다. 뒤를 잇는 것은 덩샤오핑의 30년. 1978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1997년 사망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사후에도 중국 권부는 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권좌에 차례로 오른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생전에 최고지도자로 낙점했던 인물들이다.

“건국 후부터 지금까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로더릭 맥파쿼 하버드대 교수)는 말은 그래서 틀린 게 아니다. 마오쩌둥의 30년은 권력투쟁에 의한 ‘피’가, 덩샤오핑의 30년은 경제개발을 위한 ‘땀’이 지배했다는 게 차이점일 뿐이다.

사상 최초의 합의추대

시진핑의 등극은 중국 권력사에 제3막이 열렸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최고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계파 간 합의에 의해 선출됐다. 때론 살벌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해가 다른 정파간 타협의 결과로 탄생한 지도자다.

큰 변화지만 중국 정치의 진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중국의 헌법엔 공산당이 나라를 이끈다고 명기돼 있다. 공산당이 지켜야 할 절대 규율은 당장(黨章)에 기록돼 있는 지도이념이다. 문제는 지도이념이 무려 5개나 되고, 더구나 이들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크게 봐도 공산주의의 원리교서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사상은 자본주의를 수용한 덩샤오핑이론이나 자본가의 이익보호를 천명한 (장쩌민의) 3개 대표론과 부딪친다. 이 둘 사이의 어정쩡한 조합이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이다. 주의(主義), 사상(思想), 이론(理論), 론(論), 관(觀)으로 차별화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각 ‘이즘’은 주체성마저 강조한다.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권위가 부여되지만 서로 상충되는 모순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각 정파가 상대방을 부정하며 살벌한 싸움을 벌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컨대 공산주의 원리주의자 같은 행동을 하다가 철퇴를 맞은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의 신좌파, 성장 우선론자인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쩡칭홍의 태자당, 그리고 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후진타오의 공산주의청년단은 모두 각기 다른 지도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합의에 의한 추대’가 갖는 기본적 정신이 각 정파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라면 시진핑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길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충돌하는 5개의 지도이념

엄청나게 커진 기득권 집단도 시진핑의 운신을 제약할 요소로 꼽힌다. 8260만명의 공산당원은 세계 최대의 기득권층이다. 은퇴한 고위관리와 군 장성들은 기득권 집단의 파워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푸얼다이(富二代), 관얼다이(官二代) 등으로 불리며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신흥 세도가들도 탄생했다. 새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한 면면이 모두 보수적 인사인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기득권을 제도화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시진핑은 지난 15일 신임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함께 대중 앞에 처음 나서 중화 부흥, 부패 척결, 관료주의 타파, 빈부격차 해소, 개혁·개방의 지속적 실시 등을 언급했다. 어느 곳에 방점이 찍혀 있는지 알기 힘든 수사법이었다. 각 계파가 강조하는 바를 두루 반영했다. 이것만 봐도 시진핑이 5개의 ‘이즘’을 비롯한 각 정파의 이해, 그리고 기득권층과 개혁세력의 충돌이 빚는 혼란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고 지도자로서 첫발을 떼는 시진핑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장(黨章)의 지도이념에서 벗어나 ‘시진핑의 길’을 찾는 것인지 모른다.

조주현 논설위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