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최고급 쇼핑가인 매디슨애비뉴 72가. 고풍스러운 한 건물이 눈길을 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형적인 미국 상류층 가정의 모습이 펼쳐진다. 화려한 소파와 우아한 촛불장식, 벽면을 가득 메운 고상한 그림들, 옷걸이에 나란히 걸려 있는 클래식한 슈트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모든 제품에 라벨이 붙어 있다. 이곳은 집이 아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패션 브랜드 폴로 매장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뉴욕 본점 매장이다. 랄프 로렌 폴로 최고경영자(CEO·73)의 꿈이 고스란히 담긴 ‘폴로 테마파크’인 셈이다.

로렌 CEO는 1986년 이 건물을 사들여 외부 디자인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온통 폴로 제품으로 꾸몄다. 소비자들이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 즉시 ‘폴로식 라이프스타일(생활방식)’을 꿈꾸도록 설계한 것이다. 폴로식 라이프스타일이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미국 상류층의 삶을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꾸는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것이다. 전략은 통했다. 이 매장은 개장 첫주 100만달러(약 11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폴로 뉴욕 본점은 로렌의 경영철학을 잘 보여준다. “나는 옷을 디자인하지 않습니다. 꿈을 디자인합니다.”

○마케팅의 천재, 꿈을 디자인하다

“이 옷은 품질에 초점을 맞춰 개발했습니다. 품질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광고하면 어떨까요?” 광고 담당자가 물었다. “아니, 옷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마세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전체적인 분위기를 강조하세요. 폴로식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란 말이에요.”

로렌은 광고와 마케팅에서도 소비자들의 꿈을 자극하는 전략을 활용했다. 그가 ‘디자인을 파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유다. 광고모델은 유명한 스타가 아닌 일반인을 썼다.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전략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먹혔다. 현재 폴로는 세계에서 100개가 넘는 라이선스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57억달러(약 6조2000억원)에 달한다. 패션업계에서는 그를 ‘마케팅의 천재’라고 평가한다.

로렌 자신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주인공이다. 그는 1939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유대인 이민자인 페인트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그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앨범 사진 밑에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고 썼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남성복 브룩스브러더스 세일즈맨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스스로 패션감각이 있다고 생각한 로렌이 패션사업을 통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하지만 고졸 학력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밤엔 뉴욕시립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낮에 일한 것만으로는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후 장갑회사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구했다. 세일즈맨으로 취직한 그는 곁눈질로 디자인을 배워나갔다. 패션사업을 통해 부자가 되려면 우선 디자인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남성복 브랜드 보 브럼멜의 넥타이 디자이너로 채용되면서 패션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놨다.

○세일즈맨에서 패션사업가로

“넥타이 디자인이 지나치게 튀어요. 유행을 좀 염두에 두고 디자인하지 그래요?” “제 디자인이 싫으면 받지 마세요. 저는 절대로 디자인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1967년 로렌은 뉴욕 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구매 담당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당시엔 폭이 좁고 어두운 색상의 넥타이가 유행이었다. 하지만 로렌이 디자인한 제품은 폭이 넓고 화려한 유럽풍 넥타이였다. 구매 담당자가 튄다고 생각할 만했다.

로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창업해 처음으로 내놓은 제품에 대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웬만한 디자이너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구매 담당자는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매장에 넥타이를 진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넥타이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수많은 넥타이 판매점에서도 납품 요구가 이어졌다. 폴로는 이렇게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넥타이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곧 남성복 사업에 뛰어들었다. 폴로 남성복의 컨셉트는 ‘클래식’으로 정했다. 영국 귀족의 클래식한 스타일에 미국식 멋을 가미한 세련된 폴로 스타일을 만들었다. 미국 남성복 유행을 주도하는 뉴욕 맨해튼의 부유한 엘리트 남성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폴로 스타일’은 대성공을 거뒀다. 로렌은 1970년 ‘미국의 패션 오스카’로 불리는 코티 어워드 상을 수상했다.

자신감이 붙은 그는 거침없이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여성복(1972년)은 물론 아동복(1976년), 향수(1978년), 가정용품(1983년), 골프웨어(1990년), 스포츠웨어(1993년)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혀나갔다. 1995년엔 페인트 제품까지 선보였다. 마케팅 전략에 맞춰 폴로식 라이프스타일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고객들이 폴로 페인트로 칠한 집에서 폴로 옷을 입고, 폴로 침대에서 폴로 침구를 덮고 잠들고, 폴로 접시에 음식을 담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타고난 사업가, 폴로 셔츠를 만들다

로렌이 20대였던 1960년대. 당시 1930년대 유명 테니스 챔피언 르네 라코스테가 입었던 피케 셔츠가 유행했다. 로렌은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디자인의 라코스테 셔츠가 왜 다시 유행하는 것일까. ‘유행을 타지 않는 단순함’이 비결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1972년 로렌은 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폴로 셔츠를 내놨다. 라코스테 셔츠는 세 가지 색상으로 출시됐다. 소재도 면과 폴리에스터 혼방이었다. 그는 라코스테를 넘어서기 위해 순면으로 된 24가지 색상의 폴로 셔츠를 내놔 또 한 번 큰 성공을 거뒀다.

깃이 있고 단추가 2~3개 달린 반소매 스타일의 폴로 셔츠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1970년대 나온 폴로 셔츠를 2010년대에 입어도 촌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습기를 잘 흡수하는 데다 세탁하기도 수월해 실용적인 것도 장점이다.

같은 스타일의 셔츠를 어떤 의류업체가 만들어도 ‘폴로 셔츠’로 부르게 된 배경이자 로렌의 탁월한 사업 수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의류업체들이 해마다 유행에 맞춰 디자인을 바꿀 때 로렌은 자신만의 클래식한 스타일을 고집했다. 그는 “시간을 초월해 영원토록 모두로부터 사랑받는 스타일, 언제까지나 장수할 수 있는 스타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많은 돈을 벌어들인 로렌은 기부 활동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뇌종양을 앓았던 그는 랄프로렌 암 예방 및 치료센터를 설립해 암 환자를 돕고 있다. 유방암 퇴치 재단과 에이즈 감염자 지원단체 등도 후원한다. 가난한 지역의 암 예방 및 치료를 위한 ‘핑크포니’ 캠페인도 벌였다. 로렌은 패션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자선활동 등을 인정받아 2006년 타임지로부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