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일본 최대 비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르네사스가 작년 1월에 이어 두 번째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회사가 예상한 감원 규모는 5000명 선. 그러나 명예퇴직 신청서를 제출한 직원은 7500명에 달했다. 전체 임직원의 17% 수준이었다. 일본 언론들이 퇴직자들을 붙잡고 물었다. 나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회사에 더 이상 미래가 없어서….”

일본 반도체산업의 마지막 보루로 불렸던 르네사스가 좌초 위기에 몰렸다. 2010년 출범 이후 줄곧 적자행진을 지속했고, 올 회계연도엔 1500억엔(약 2조1000억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적자를 낼 전망이다. 결국 일본 정부가 나섰다. 5000명을 추가 감원한다는 조건으로 정부와 도요타 등 일본 제조업체가 함께 르네사스를 공동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르네사스는 NEC 히타치제작소 미쓰비시전기 등 일본 주요 반도체업체가 2010년 4월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만 따로 떼어내 설립한 회사다. 한국 미국 등 경쟁 기업에 대항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1990년에만 해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상위 10개 기업 중 일본 기업은 1, 2위인 NEC와 도시바를 포함해 6개가 포진했다. 그러나 화려한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작년엔 도시바(3위)와 르네사스(5위) 단 두 곳만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르네사스로 대표되는 일본 반도체산업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투자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반도체산업은 대규모 장치산업이다. 그래서 ‘규모의 경제’ 논리가 극명하게 적용된다. 대량생산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일정 수준 이상 확보하지 않으면 유지가 불가능한 구조다. 르네사스는 이런 논리의 반대 방향으로 말려들었다. ‘투자 결정 지연→제품 단가 상승→시장점유율 하락→가격경쟁력 상실’의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유노가미 다카시(湯之上隆) 나가오카(長岡)기술대 교수는 “반도체의 주요 용도가 3~4년 쓰다 버리는 개인용 PC나 휴대폰이라는 점에서 일본 반도체업계의 기술은 분명 과잉”이라며 “과잉 기술로 과잉 품질을 만드는 고질병이 일본 반도체 기업의 침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분업화라는 세계 시장의 흐름에 둔감했던 것도 패착으로 지목된다. 갈수록 반도체 주기가 짧아지면서 기업이 홀로 모든 공정을 감당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는 “일관생산 시스템을 고집한 일본 반도체업체들이 분업화라는 세계 흐름과 동떨어지면서 급속히 경쟁력을 잃어갔다”고 분석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