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의 문제점을 지적하라.’ 200자로 답하는 한경 수습기자 시험문제의 하나다. 답안을 보니 “소수 의견이 무시된다.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히틀러도 절대 다수의 지지로 집권했다. 대중은 휩쓸리기 쉬워 포퓰리즘이 득세한다. 민주주의의 유일한 의사결정 방법이지만 하자가 많다’ 등의 답이 나왔다. 옳은 지적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치에 함몰되면 생각의 틀이 확 바뀌는 것 같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란 간편 이분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다수의 횡포조차 집단 내에선 상식이자 집단지성으로 합리화된다. 여기에다 우리 편은 늘 옳다는 진영논리까지 더해지면 외골수 고집불통이 되고 만다.

상대방에 '과거세력·짝퉁' 낙인

대선을 3주 앞둔 지금 그런 이분법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민주통합당은 새누리당을 과거세력, 자신을 미래세력으로 규정한다. 반면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과거타령 세력이고 자신은 미래준비 세력이란다. 똑같이 미래·과거를 들먹이면서 ‘나만 진짜’라고 우긴다. 사실 유권자들도 지지후보에 따라 강 건너편에서 평행선을 달린 지 오래다.

여야의 경제민주화 싸움은 서로 원조라고 우기는 설렁탕집 주인들 같다. 나는 원조, 너는 짝퉁이다. 그런데 누구도 경제민주화가 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정치 구호를 시대정신이라고 내걸었으니….

최근 트위터를 달군 유아인과 배슬기의 경우도 비슷하다. 트위트 글에 안철수 사퇴 유감을 썼는데 유아인은 졸지에 개념, 성숙 배우로 떴고 배슬기는 무개념, 미숙의 훈장을 달았다. 민주당은 유아인의 발언을 겸허히 수용한다는 논평까지 냈다. 반면 배슬기는 ‘종북자 무리가 싫다’는 트위트 한 줄로 십자포화 대상이 됐다. 동갑내기(26세) 두 배우가 조만간 영화 ‘깡철이’에 첫사랑으로 나온다니 참으로 공교롭다.

정치과잉과 이분법이 판치는 사회는 침묵의 나선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한 쪽과 일치하면 적극 표출하고 아니면 입을 닫는다. 그 어떤 개인도 집단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을 때까지 옹호하겠다”던 볼테르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위기보다 더한 정신의 위기

‘1984’의 빅 브러더 사회가 그랬다. 생각까지 검열하는 사상경찰이 판치고 텔레스크린에는 ‘2분간 증오’ 대상을 수시로 비춰주며 집단증오를 자극한다. 개인을 공격하는 주체가 국가가 아닌 대중이란 점만 다를 뿐이다. 한국 정치는 이에 편승해 더 자극적인 증오 프로그램을 생산해 낸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내년 경제는 고난의 행군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올해 2.2%, 내년 3.0% 성장을 예상했다. 차마 2년 연속 2%대 바닥성장 전망을 내놓기 민망했을 것이다. 당선 축하가 비난과 욕설로 급선회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경제위기는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극복해 낼 것이다. 진짜 위기는 정신의 위기다. 저성장 고착화라는 공공의 적은 모든 이들이 스스로 버려진 세대로 여기게끔 만들고 있다. 자애로운 국가, 만능 정부에 대한 기대가 팽배하다. 내 인생도 국가가 책임지라는 요구에 그렇게 해주겠다는 헛공약이 난무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국가가 계획할수록 개인은 스스로 계획하기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남유럽이 그러다 망가졌고 일본도 그렇게 쇠락하고 있다. 이제 한국이 그 길로 가는가.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