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권산업이 위기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의 거센 풍파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국내 증권사들이 이제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외부 충격에 따른 일시적 '쇼크'에는 강한 내성과 복원력을 자랑했지만 디플레이션(물가의 지속적 하락)과 이에 따른 안전자산 선호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줄기 앞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한국경제신문 온라인미디어 [한경닷컴]은 백척간두에 놓인 한국 증권산업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불안한 경제 환경과 주식시장 정체 속에서도 살아남은 일본 증권사들에 주목했다. 일본은 이미 '증권사 대마불사(大馬不死)'란 말이 사어(死語)가 된지 오래다.

부동산과 IT(정보기술) 버블 붕괴, 이에 따른 극심한 경기침체 속에서 일본 증권사들이 어떤 생존전략으로 살아 남았는지를 현지 취재를 통해 속속들이 살펴봤다. 앞으로 5회에 걸쳐 [디플레 25년, 日 증권사 생존전략]을 주제로 한 기획시리즈로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편집자 주>
[디플레 25년, 日증권사 생존전략①]"증권사 '대마불사'는 끝났다"…내년 30개 도산 '대기'
[디플레 25년, 日증권사 생존전략①]"증권사 '대마불사'는 끝났다"…내년 30개 도산 '대기'
"닛케이지수를 보세요. 주식시장이 열렸는데도 그래프가 일직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의 심장 박동이 멈춘 것과 같지 않습니까."

지난달 26일 오전 일본 주요 증권사들의 본점이 모여있는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주식시장이 열려 있는 시간인데도 일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긴자(銀座)에서 지하철로 불과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그 곳은 스산하기만 했다. 증권사 영업점에는 손님 인기척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쓰오 오사무 도쿄증권거래소 홍보과장은 "내년에도 전체 273개 증권사 중 30여개 중소형 증권사가 도산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사회에 폐를 끼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흑자 도산을 택하는 증권사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성장·고령화에 자산가로부터 외면받는 주식시장

일본 자산가들은 주식시장의 배신을 잊지 못한다. 1989년 4만포인트에 육박했던 닛케이지수는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면서 하락 추세로 접어들었다.

2000년대 IT 버블로 지수가 다시 살아나는 듯 싶었지만 이내 버블이 꺼지면서 지수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최근 닛케이지수는 1만포인트도 밑돌고 있다. 경제 성장률이 정체되면서 주식 시장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사그라든 탓이다. 주식 거래 대금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증권사의 수익도 급감했다.

일본의 3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연 0.03~0.04%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돈은 증권사가 아닌 은행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위험자산을 회피하는 경향이 그만큼 강하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작년 기준 가계 금융자산 1515조엔 중 현금·예금 비중은 55.7%인 반면 주식·출자금은 6%에 불과하다. 미국의 경우 현금·예금은 14.7%인 반면 주식·출자금은 32.6%에 달한다.

가쓰오 홍보과장은 "예금 인출시 수수료가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마이너스(-)인 셈인데도 대부분 일본인들은 저축에만 힘을 쏟고 있다"며 "그나마 현금을 쥐고 있는 60대 이상이 주식시장에 주된 투자층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컨설팅 업무를 맡고 있는 다나카 야스후미 소셜라이프랩 대표도 "일본의 주요 근로계층인 40대는 투자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다"며 "40대 이하는 열심히 일을 하고 저축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디플레 25년, 日증권사 생존전략①]"증권사 '대마불사'는 끝났다"…내년 30개 도산 '대기'
◆증권업계에 부는 칼바람…'살 길'을 찾아야 한다

일본 증권사들은 장기 침체의 긴 터널을 헤쳐나오기 위해 지난 25년간 끊임없이 몸부림을 쳤다. 체질을 변화시키지 못한 증권사는 살아남지 못했다. 업계에 따르면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147개 증권사가 도산하거나 폐업, 피합병됐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형증권사, 야마이치증권조차 주식매매 수수료 수익 감소로 적자로 돌아선 지 5년만에 무너졌다. 야마이치증권은 고객 예탁자산 24조엔에 117개 지점, 7500여명의 종업원을 둔 대형사였지만 경영악화 등을 견디지 못하고 1997년 폐업을 선언했다.

2000년대 자신의 규모와 특색에 맞게 활로를 찾은 증권사들만이 살아남았다. 노무라와 다이와 등 대형 증권사들은 위탁매매에 대한 수수료 경쟁을 지양하고 자산관리형 업무로 전환했다. 미즈호, 닛코 등 대형사는 은행과의 협력을 택했다.

오카산, 아이자와 등 중소형 증권사는 해외상품 등 전문 분야를 특화시키며 생존을 꾀했고, SBI증권은 1999년 증권업 규제 완화를 기회로 탄생해 온라인 전문 증권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국내 증시에서도 거래량이 급감하면서 증권사들이 브로커리지에 의존하는 수익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앞서 불황을 겪은 일본 증권사들의 생존전략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사가 다카오 일본증권경제연구소 주임연구원은 "일본은 20년 이상 디플레이션을 겪어왔고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투자에 애를 먹고 있다"면서도 "자신만의 특징을 갖고 있는 증권사들은 나름의 생존 전략을 찾아왔고, 튼실한 경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일본) = 한경닷컴 김효진 기자·정인지 기자 ji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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