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은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다. 유동성은 시장에 흘러 넘친다. 문제는 투자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한 금융지주 CEO는 얼마 전 송년회 자리에서 은행들의 난감한 처지를 이같이 토로했다. 장기 저성장·저금리 상황을 맞게 된 데 대한 당황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실제 저금리는 금융회사엔 공포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줄고 불확실성이 커지는데 자금을 끌어다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장 은행권은 비상이다. 금융감독원의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경제성장률을 1%로 잡고, 기준금리가 지금보다 1%포인트 떨어진다고 할 때 5년 뒤 은행들의 순이익이 올해보다 83.5% 줄어들 것이란 분석이다. 10년 뒤에는 5조원 넘는 적자를 낸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팔았던 금융상품은 역금리 문제를 부른다. 보험사들이 특히 그렇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팔았던 장기 확정형 금리 보험상품이 화근이다. 전체 책임준비금 가운데 연 6%를 넘는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35%, 7~8%짜리가 30.5%(올 6월 말 기준)나 된다. 과거 고금리 수신경쟁이 역마진을 낳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형국이다.

A등급 회사채도 발행 막혀

저금리를 걱정하는 금융시장이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다. 회사채 발행이 그렇다. 신용등급 A 이상인 우량기업도 연 4%를 넘는 금리를 부담하고 회사채를 겨우 발행한다. 3년 국고채 금리(연 2.83%)보다 1%포인트 이상 높다. 저금리 시대가 무색하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금리를 줘도 회사채를 인수하려는 기관들이 없다는 것이다. A마이너스 등급이던 웅진홀딩스의 법정관리 신청 후 회사채 거래 기피가 심각해진 탓이다. 그래서 증권사들마다 미매각 회사채를 끌어 안고 있다. 3조원 이상의 우량 회사채를 떠안고 있는 증권사만 4~5 곳이나 될 정도다. 이미 인수 한도는 거의 꽉 찼다. 더욱이 내년에 만기도래하는 A등급 회사채는 올해보다 2000억원 많은 19조8000억원에 이른다. 회사채 원리금 상환은 고사하고 차환 발행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A등급 기업이 이 정도니 BBB등급 이하 중견기업이 어떤 형편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기업금융시장의 총체적 위기다. 이런 판에 금융권에서는 국내 신용평가회사들이 기업평가를 부풀린다며 등급을 못 믿겠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금융권은 저금리를 걱정하지만 금융의 기초인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게 더 걱정이다.

안방 기업금융부터 제대로

유동성 과잉 속에서 기업 자금난을 걱정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연기금은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며 해외로 나가 부동산을 열심히 사도 국내에서 우량기업 회사채는 외면한다. 금융당국이 금융의 글로벌화, 투자은행(IB) 대형화를 외치는 사이에 정작 기본 중의 기본인 안방 기업금융시장은 무너져가는 판이다. 서민대출을 늘리라는 독촉은 있어도 기업금융을 살리려는 노력은 없다. 공직사회에는 내년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몸조심이 최우선이라는 복지부동이 만연하다. 수장이 바뀔 텐데 공연히 일을 벌여 부담을 짊어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기 정부에도 살아남자는 ‘남행열차’ 행렬이다.

금융이 기업활동을 지원하고 실물경제를 뒷받침하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문제가 풀린다.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자면서 금융의 최대 수요자인 기업을 도외시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기업이 어려울 때 도와주지 못하는 금융이라면 설 자리가 없다. 우량 기업마저 살리지 못하면 우리 경제에 뭐가 남는가. 기업이 없으면 금융도 없다.

문희수 논설위원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