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건 선거 때마다 캠페인을 벌이며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끌어내려 애쓴다. 투표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는 나라도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도 투표율이 쑥쑥 올라가지 않는 데는 까닭이 있다. 우선 후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비교하는 데 적잖은 품이 들어간다. 또 신분증을 챙겨 기표소까지 가는 수고도 감수해야 한다.

반면 투표 결과로 유권자가 얻는 혜택은 미미하다.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됐다 해도 당장 손에 잡히는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한 표가 당락을 결정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유권자라면 투표를 하지 않는게 맞다. 이른바 ‘합리적 무관심’이다.

유권자의 생각이 투표에서 그대로 반영된다는 보장도 없다. 유권자가 A를 B보다 선호하고(A>B), B를 C보다 좋아한다(B>C)고 치자. 그러면 A에 대한 선호도가 C보다 더 높아야(A>C) 한다. 하지만 최다득표제에서는 오히려 C가 A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는 결과(C>A)가 나올 수도 있다. 다수결에 바탕을 둔 선거가 반드시 합당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18세기 프랑스 수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콩도르세가 주장했다고 해서 이를 ‘콩도르세의 역설’, 또는 ‘투표의 역설’이라 부른다.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케네스 애로는 아예 투표에 의한 합리적 의사결정이 불가능하다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다수결로는 개인의 선호도를 사회 전체의 선호도로 종합해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위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다.

투표를 통해 당선된 사람이 유권자의 뜻을 정책으로 채택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양측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권자는 세금을 아껴쓰기를 바라는 반면 당선자는 빚을 내서라도 번듯한 청사를 짓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당선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오죽했으면 수학자겸 저널리스트인 조지 슈피로가 ≪대통령을 위한 수학≫이란 책에서 ‘무엇보다 불행한 점은 선거의 역설과 불일관성, 선거조작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유일한 정치방식은 바로 독재’라고 비꼬았을까.

선거는 이렇게 흠이 많은 제도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안된 민주적 의사 결정 방식 중 선거 보다 나은 것은 없다. 세계 각국에서 끊임없이 선거가 치러지고 있는 이유다. 오늘은 새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합리적 무관심의 유혹을 털어내고 투표장을 찾는 유권자가 많았으면 한다. 그런 고민과 노력이 쌓이면서 민주주의는 조금씩 발전해 간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