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봄 네덜란드 접경지역에 있는 독일의 작은 시골마을 보홀트. 이곳에 있는 테이프 유통업체 키프에 34세의 한국 젊은이가 들어섰다. 대전에서 인천공항을 거쳐 프랑크푸르트에 내린 뒤 고속철도와 지방철도를 갈아타고 무려 20시간 걸려 도착한 것이다. 그는 허름한 호텔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오전 9시 사무실을 노크했다.

이 회사 사장과의 면담을 위해 10여 차례 메일을 보내자 ‘그럼 한번 들어오라’는 짤막한 답변이 돌아온데 따른 것이다. 어렵사리 방문했지만 독일 회사 대표는 “담당 부장하고 상담해보라”고 한마디 던진 뒤 무뚝뚝한 표정으로 책상에서 자신의 일만 할 뿐이었다. 눈길을 한번도 주지 않았다. 낮 12시까지 3시간 동안 이 회사 부장과 테이프 수출 상담이 이어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키프 사장은 식사나 함께 하자고 제안한 뒤 테이프 품질이 어떤지, 규격은 어떻게 해줄 수 있는지, 가격은 얼마까지 내려줄 수 있는지를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대화는 무려 7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뒤 키프에서 4만달러짜리 첫 오더를 따낼 수 있었다.

이 젊은이가 안경남 위더스코리아 사장(51)이다. 그는 1994년 테이프 업체인 안진마스커를 창업해 이듬해 봄 보홀트를 찾았던 것이다. 키프의 사장이 처음에 그렇게 박대했던 것은 ‘그동안 한국 제품의 품질이 너무 나빠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테이프를 떼어내고 난 뒤에도 점착제(adhesive)가 덕지덕지 붙어있다든지, 비닐에 붙였던 테이프를 떼어내려 하자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비닐이 찢어진다는 등 문제가 많았다. 그 사장은 한국 제품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담당 부장과 3시간 동안 상담하는 내용을 옆에서 들으니 믿을 만하다고 판단해 오후부터 장시간 미팅을 이어간 것이다.

키프는 이제 위더스코리아의 최대 고객이 됐다. 이 회사는 위더스코리아에 연간 약 300만달러어치를 주문한다. 위더스코리아는 이 회사를 비롯해 독일에만 10개의 대리점을 두고 있다. 안 사장은 “이들을 통해 연간 약 1000만달러어치를 독일과 네덜란드 등 유럽 인접국에 수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그는 “이들 대리점을 통해 독일군이 훈련 중 쓰는 테이프를 공급할 뿐 아니라 내년부터는 러시아군이 쓰는 테이프도 내보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위더스코리아와 자회사인 안진마스커는 테이프를 만드는 업체다. 이들 2개 회사는 연간 2300만달러를 수출한다. 수출 국가는 25개국, 바이어는 100개 업체에 이른다. 유럽과 동남아가 전체의 약 70%를 차지하고 일본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이 그 뒤를 잇는다. 내수는 15%에 불과하다.

이 회사가 만드는 테이프는 주로 ‘천테이프(cloth tape)’다. 폴리에스터와 면천에 점착제를 발라 만든 제품이다. 용도는 다양하다. 닥트나 파이프 고정용도 있고 철강재 포장용도 있다. 차량이나 건물 도장 때 페인트가 묻지 않도록 붙이는 테이프가 있는가 하면 박스 포장용도 있다. 이 회사가 세계 시장을 뚫은 데는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일까.

첫째, 26년간 테이프 외길을 걸으면서 쌓은 노하우다. 안 사장은 부산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6년 부산 소재 럭키테이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테이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다. 수출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 그는 1994년 대전에서 안진마스커를 창업했다. 처음에는 해외시장을 뚫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변경 소도시 보홀트를 25번이나 방문하는 등 부지런히 바이어를 찾아다녔다.

둘째, 신기술 개발이다. 테이프를 만드는 공정은 비교적 단순하다. 천을 짠 뒤 점착제를 바르고 적당한 크기로 감아주면 된다. 하지만 일등 제품을 만드는 건 까다롭다. 테이프는 점성이 적당해야 하고 떼어낸 뒤 끈끈한 자국이 남지 않아야 한다. 때로는 단단하게 파이프를 고정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쉽게 떼어낼 수 있어야 한다. 여성 근로자들이 전자 제품을 조립할 때 쓰는 테이프는 손으로 쉽게 찢을 수 있어야 한다. 컨테이너에 실려 적도를 지날 때 내부온도는 섭씨 영상 70도가 넘는다. 이런 온도에서도 테이프의 물성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 친환경적이어야 하고 각종 규격을 통과해야 한다.

안 사장은 기술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는 자체 인력을 통해 연구·개발하는 것은 물론 대덕의 국책연구소나 대학에 자사의 문호를 활짝 개방해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기술이 외부로 새나갈 것을 걱정할 만도 한데 안 사장은 “선도업체로서의 자신감 덕분에 대학이나 연구소에 문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천테이프 제조방법, 폼마스커 제조방법, 합성수지 배분방법 등 3건의 기술을 개발해 특허 등록했다. 형광테이프, 쉽게 떼어내는 테이프, 두께를 줄인 에코테이프, 난연테이프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다. 최근 2년 동안 중소기업으로선 적지 않은 금액인 60억원을 설비에 투자했다. 이 회사의 몇몇 제품은 까다로운 물성을 요구하는 국내외 원자력 발전소에도 공급된다. 안 사장은 “한국의 원전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의 원전에도 우리 테이프를 공급한다”고 말했다.

셋째, 바이어와의 신뢰다. 기술력이 올라가고 가격경쟁력이 생기자 유럽이나 동남아의 유통업체들이 대전을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은 직접 수입하고 싶다며 직거래를 제안해온다. 하지만 안 사장은 정중히 거절한다. 기존 거래처와 신뢰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바이어들도 안 사장을 믿고 대부분 10년 이상 거래하고 있다. 그는 “끈끈한 테이프처럼 우리 비즈니스도 일단 한번 연결된 뒤에는 끈끈하게 유지되는 게 중요하다”며 “바이어와의 신뢰를 토대로 3년 내 4000만달러 수출 고지에 올라설 것”이라고 자신했다.

"유럽서 부는 韓流…수출에 적극 활용 해야죠"

안경남 사장이 처음 유럽 시장을 개척할 때인 1990년대 중반만해도 한국 제품에 대한 평가는 “그럼 그렇지,별 수 있어”였다. 하지만 요즘은 완전히 바뀌었다. 혹시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한국 제품인데 왜 이렇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에 가보면 한국 제품으로 시작해 한국 제품으로 하루 해가 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안 사장은 바이어로부터 “현대자동차로 출근해 삼성 스마트폰으로 일을 보고 퇴근 후 LG TV로 축구를 보고 한국 세탁기로 빨래하면서 전자레인지로 요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그런 우수한 한국 제품에 익숙한 유럽 젊은이들은 혹시라도 한국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한국 제품인데 왜 이럴까”라고 반문한다는 것이다. 안 사장은 “심지어 독일 시골마을인 보홀트나 인근 네덜란드 파세펠트(히딩크 고향)에 가

면 시도 때도 없이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오고 아이들은 의미도 모른 채 ‘갈 때까지 가보는 거야’를 외친다”고 한다.

안 사장은 “유럽시장을 한국의 전자제품이 주름잡는데 이어 한국의 K팝이 상륙하고 싸이까지 가세하자 유럽에 한국 돌풍이 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요소들이 시장을 개척하는 데 순풍으로 작용하고 있어 무역업체들은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논산=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