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한 곳과 20년째 거래하고 있는 협력업체 김모 사장(60). 주말을 잊은 지 오래다. 오전에는 접대골프를 나가야 하고 오후면 때때로 거래처 임원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

고급 호텔에서 결혼식이 있을 때는 30만원 이상 넣은 축의금 봉투를 만들어 줄을 서서 낸다. 거래처 임원이 상(喪)을 당하면 주중이라도 지방에 있는 장례식장을 찾아 적잖이 부조를 한다. 부모상일 때는 보통 50만원짜리를 만든다고 했다.

LG그룹은 3일 이 같은 폐해를 줄이기 위해 임직원들이 협력사 직원을 비롯한 업무 관련자에게서 경조금을 받지 못하도록 윤리규범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하는 협력사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임직원에게 협력사와 거래업체에서 경조금이나 선물을 일절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동안 LG 임직원은 5만원 이내 경조금과 승진 축하 선물은 계열사 윤리사무국에 신고하지 않고 협력사나 거래업체에서 받을 수 있었다.

사내 게시판에 임원 자녀 결혼식 소식을 공지하던 관행도 중단한다. 위반하면 사안에 따라 인사상 불이익을 줄 예정이다. LG는 경조금 관련 공문을 전체 협력사에 전달해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전무급 이상 임원은 자율적으로 특급 호텔 같은 호화 예식장을 피하고 하객 규모와 예물을 최소화하는 ‘작은 결혼식’ 캠페인에 동참하기로 했다. LG는 이미 결혼식장을 잡은 사례도 있고 계열사별 임직원 교육도 필요하다고 보고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전 계열사에 새로운 윤리규범을 적용할 방침이다.

LG 관계자는 “정도 경영을 실천하려는 구본무 회장의 의지에 따라 경조사 규정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구 회장은 지난 2일 신년사에서 “정도 경영과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윤리 경영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며 “협력회사가 성장의 동반자임을 잊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사회를 돌아보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적극 동참하자”고 했다.

구본무의 '正道경영' 의지…위반 땐 인사 불이익

LG의 경조사 자정 운동은 일부 대기업 관계자들이 경조사를 치르면서 협력사들에 얼마나 많은 부담을 주고 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협력사가 수백개인데 못 챙겨 먹으면 바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한 중소기업 사장은 “어머니 칠순은 그냥 보내도 거래처 직원 부모 환갑이나 칠순은 꼭 챙겨야 하는 게 을의 현실”이라고 한탄했다. “비용 절감 때문인지 요즘은 부서 회식 때 부르는 거래처 직원들도 종종 있다”고 했다.

협력업체들이 알아서 기는 일도 적지 않다. 작년 초 한 대기업 사장은 아들 결혼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협력사는 물론 내부 임직원에게도 비밀에 부쳤다. 그래도 결혼식장에는 알음알음 알고 찾아온 거래업 체 임직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모두들 ‘갑의 눈밖에 날까’ 두려워 두툼한 봉투를 들고 눈도장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대기업도 앞다퉈 윤리 경영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포스코는 앞서 작년 11월 협력사 등 이해관계자에게 청첩장을 돌리지 않고 축의금 한도를 5만원으로 하는 사내 윤리규범을 만들었다.

삼성은 2011년 하반기부터 협력사에서 경조금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경조사를 알릴 때부터 ‘경조금이나 화환은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도록 하고 있다. 승진을 축하하는 난과 선물을 수수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난은 협력사에 돌려주고 상품권과 선물 등은 계열사 인사팀에 반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