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진사가 여학생들이 증명사진을 찍을 때 몰래 학생 뒤에서 바지를 내리고 사진을 함께 찍은 사건이 있었다. 사진사는 사진기의 타이머를 눌러 놓고 여학생이 알아채지 못하게 뒤에서 성기를 노출한 채 사진을 찍었다. 피해자들은 이 사진사를 처벌해 달라며 경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서울 고등법원은 파렴치한 이 행위에 대해 지난해 12월 무죄를 선고했다.

#. 다른 지역에서 자란 한우를 사다가 횡성에서 2개월 동안 키운 뒤 도축해 ‘횡성한우’라고 속여 판매한 사건이 2010년 일어났다. 횡성한우는 고급 한우 브랜드로 다른 지역의 한우보다 잘 팔리는데 공급량을 맞추지 못하자 농협 직원들이 이 같은 편법을 동원한 것. 검찰은 원산지 표시 규정을 위반한 사기 행위로 보고 직원들을 기소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판매 당시엔 축산물 원산지 표시에 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며 지난해 11월 무죄를 선고했다.

‘변태 사진사’ 사건과 ‘횡성한우’ 사건을 무죄 판결한 대법원에 대해 피해자와 해당 사건을 맡았던 판사까지 나서 잘못된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네티즌들은 이 사건을 놓고 사이버 공간에서 연일 들끓었다. 피해자들은 파렴치한 행동을 한 피고인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사건의 2심 판결을 맡았던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43·사법연수원 25기)도 자신의 판결을 뒤집은 대법원에 대해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빠져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는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김 판사는 현재 대법원 윤리위원회에 회부돼 조사를 받고 있다.

◆죄형법정주의 부인 할 순 없지만

이처럼 일반 상식의 잣대로 보면 엄연히 처벌받아 마땅하거나 엄벌에 처해져야 할 사건이 무죄나 감형되는 건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 원칙 때문이다. 어떠한 행위가 범죄가 되며 또 어느 정도의 벌(罰)을 과하게 되는지를 법령으로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사람을 벌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법률 없이는 형벌도, 범죄도 없다’는 근대법의 기본원칙 중 하나다. 근대형법에 있어 형법의 근본원리로 1801년 독일의 포이에르바하에 의해 처음으로 상용된 말이다. 이는 1215년 영국의 대헌장(마그나카르타 제39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법에 명시되지 않은 다양한 범죄행위가 성행, 오히려 피해자를 양산하면서 죄형법정주의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나도 (처벌할 규정이 없어) 답답하다”며 “그렇지만 죄형법정주의는 사회를 지키는 중요한 축인데 이를 무시하고 국민의 감정에 치우친 판결을 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면허정지 상태서 오토바이 몰아도 무죄

죄형법정주의의 한계로 법망은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 면허 효력이 정지된 상태에서 오토바이를 몰다가 적발돼도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자동차의 경우 운전면허를 받지 않거나 그 효력이 정지된 상태에서 운전을 하면 무면허운전으로 처벌한다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자동차와 달리 면허없이 운전한 경우에만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효력이 정지된 상태에서 운전할 때 처벌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에서 법원은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무죄를 판시했다.

의사가 환자 대신 다른 사람을 지정해 처방을 해준 사건도 무죄 판결이 났다. 서울중앙지방법원(판사 조원경)은 최근 의사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처방전을 기재했더라도 의료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소송에서 승소한 이경권 변호사(법무법인 대세)는 “편법적인 처방전 발급을 처벌하는 조항이나 허위 내용의 처방전 작성을 처벌하는 조항이 없어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의료법 조항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마약껍질 매매 무죄… 16년 지나도 개정안돼

국민 정서와 괴리가 있는 죄형법정주의 한계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건 사회가 급변하면서 법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IT) 범죄와 금융 범죄 등 범죄가 갈수록 지능적이고 교묘해지고 있지만 이를 처벌할 규정을 마련하지 못해 범죄자를 눈앞에 두고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이를 타파하려는 의미있는 노력도 있다. 최근 스토킹 행위에 대해 범칙금을 부과하도록 관련법이 개정됐다. 경찰은 상대방이 거부 의사를 밝혔는 데도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잠복해 기다리기’ 등의 행위를 하면 범칙금 8만원을 부과토록 했다. 서울의 한 경찰서 형사과장은 “요즘 같은 세상에 밤길에 뒤를 따르는 남자가 전자발찌를 찬 성폭행 전과자나 연쇄살인범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지하철과 같은 밀집장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비벼대는 변태들에 대한 처벌도 성과다. 기존엔 강제추행이나 강간으로 볼 수 없어 처벌이 불가능했다. 강제추행에 해당되려면 폭행 협박 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중밀집장소에서 추행’이라는 죄목이 새로 생겼다.

법망의 허점이 발견된 지 1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보완이 이뤄지지 않는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게 대마껍질을 팔고 사도 처벌할 규정이 없다는 것. 1970년대 만들어진 마약류에 관한 법률(옛 대마관리법)엔 대마를 사고 팔거나 피우는 행위, 대마껍질을 피우는 행위는 처벌을 명시해놓고 있다. 하지만 대마껍질 판매에 대해선 어떤 처벌규정도 없다.

1996년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권성)는 대마종자 껍질을 매매한 혐의로 기소된 차모씨와 이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섬유를 얻기 위해 재배차원에서 대마종자 껍질을 매매하는 합법적인 경우와는 달리 환각물질로 이용하기 위해 대마종자 껍질을 매매할 때 뚜렷한 처벌규정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마껍질의 흡연 및 섭취행위와 대마 매매 및 알선행위에 대해 처벌규정을 두고 있으나 대마껍질 매매 행위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처벌규정이 없다”며 “따라서 차씨 등의 경우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무죄 판결이 내려진 지 1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법개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빠른 입법으로 죄형법정주의 보완해야

전문가들은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죄형법정주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원칙”이라며 “다만 법이 규정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나 그런 종류의 공백을 입법으로 메워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만약 사법부가 법의 해석 범위를 넓혀 법의 사각지대를 없애려 한다면 사법부가 입법권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며 “이는 명백히 삼권분립의 원칙이 깨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허일태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은 왕권에 대등한 시민 권력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며 “결국 죄형법정주의를 통해 시민의 힘이 커질 수 있는데 일부 사건 때문에 이런 원칙이 무너지는 건 안된다”고 말했다.

사법부와 입법부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법의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헌법재판소 관계자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공청회를 열고 학자와 전문가, 판사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우섭/박상익/이지훈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