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이어령 이사장, "산업화·민주화는 남성원리…여성·문화원리로 세계 이끌어야"
“정치가든 기업인이든 문학인이든 연초에 결심한 것을 1년 동안 잘 지키기만 하면 한국 사회가 달라질 겁니다. 그게 바로 통합입니다.”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80)은 새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묻는 질문에 “국민 개개인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새 정부가 뭔가 대단한 걸 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며 이렇게 답했다. 어느 당이 집권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른 생각과 의지를 갖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이사장은 호적상 태어난 해는 1934년이지만 실제 생일은 1933년 12월로 올해 만 80이 된다. 지난 4일 서울 정동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80세까지는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은퇴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되는 두 시간여 동안 ‘명강의’를 펼치는 모습은 이 이사장이 왜 아직도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2013년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작년 말 ‘마야 문명 달력이 끝난다’는 등 또 한번 종말론이 등장했었죠. 저도 그런 걸 믿지는 않습니다만, 확실히 끝나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산업혁명 이후 300년 가까이 세계를 지배해온 서구 문명입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등 20세기를 관통했던 사상도 대체될 시기가 됐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구 문명의 달력이 끝나고 삶의 형태가 바뀔 때가 됐다는 것입니다. 2013년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점에서 새로운 시대입니까.

“2008년 발발한 금융위기로 인해 자본주의는 큰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죠. ‘월가 점령’ ‘99% 대 1%’라는 말들이 괜히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미국에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변화’라는 그의 큰 정책 흐름이 지지받고 있음이 확인됐죠. 중국에선 시진핑 체제가 출범했죠. 시 총서기의 취임사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동안 새 권력자가 취임사에서 의례적으로 해오던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에 대한 찬사가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바람이 불지 않으면 이대로는 살아가기 힘들게 됐다는 것을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올해 이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느냐에 국가와 세계의 명운이 달려 있습니다.”

▷‘경제민주화’도 그런 흐름일까요.

“지금 서점에 한번 가보세요. ‘자본주의’라는 말이 붙은 책밖에 안 보일 정도로 자본주의를 두고 거대한 담론이 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4.0’ ‘협력적 자본주의’ 등 기존의 자본주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시도들입니다. 인도의 경제 이론가 사카르가 수십 년 전에 했던 경제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지금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으로 등장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경제민주화는 정치 원리로 경제를 하겠다, 정치가가 기업을 경영하겠다는 건데요. 기업인들이 정치까지 장악하는 것만큼이나 실로 엄청난 변화입니다.”

▷정치 원리로 경제가 작동될 수 있습니까.

“근본적으로 정치원리와 경제원리는 모순이 있습니다. 정치원리는 1인1표, 즉 평등이죠. 하지만 경제원리는 능력껏 경쟁하는 것, 즉 자유입니다. 인간에게 절대로 필요한 평등과 자유라는 두 가지 가치임에도 양립하긴 어렵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문화원리, 즉 사랑입니다. 예전에 정치에서 사랑을 말하고 경제에 사랑을 더하자고 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죠. 하지만 앞으로는 행복을 권력이나 돈으로 쟁취하는 시대가 아니라 불행을 사랑이라는 매개체로 나눠야 하는 시대가 돼야 합니다. 경제민주화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문화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여성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 민주화와 경제 산업화를 이끌어온 것은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남성적인 원리였죠. 이제 정치와 경제 사이의 모순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그 간극을 메워주는 화합과 사랑의 여성 원리가 더해져야 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서로를 치유하고 보듬어주는 리더십이 마침 필요한 시기입니다.”

▷문화원리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문화라고 하면 미술이나 음악을 생각하죠. 하지만 문화는 삶의 형태이자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국민 개개인이 고유의 문화를 가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매년 8월 말 미국 네바다주 사막에선 ‘버닝 맨’이라는 이벤트가 열립니다. 말 그대로 ‘아무나’ 와서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보는 행사입니다. 마지막 밤에는 행사장 중심에 함께 만든 커다란 사람 모양의 구조물을 불태우면서 캠프파이어를 하죠.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기업인 구글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 이벤트를 이해해야 합니다.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최고경영자인 에릭 슈미트가 바로 이 ‘버닝 맨’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가 바탕이 됐기 때문에 구글이라는 창의적인 기업이 탄생한 것이죠.”

▷사람의 삶이 바뀌는 것이군요.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핍됐습니다. 개개인이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으면서 정치인에게만 나라를 잘 이끌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선진국을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하면서도 마지막에 벽에 부딪히는 것은 이런 국민의 의식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국민 하나하나가 바뀌면 통합도 저절로 이뤄집니다. 개인 삶의 방식, 즉 문화가 정치와 경제와 함께 조화하고 견제하고 순환해야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한국에는 2013년의 변화가 기회일까요.

“한국은 그동안 서구문명 체제 아래에서 열심히 서구 나라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해 왔죠.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쫓아가느라 소홀히 대했던 우리 고유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다만 근대화 이전에 갖고 있던 문화원리가 그동안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세계의 축이 아시아로 옮겨오는 것은 아시아 경제가 튼튼한 덕분도 있지만 바로 아시아가 문화원리에서 앞서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고유한 한국의 문화원리를 하루빨리 되살려야 합니다.”

▷문화원리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월요인터뷰] 이어령 이사장, "산업화·민주화는 남성원리…여성·문화원리로 세계 이끌어야"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가치들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아끼는 가족의 가치, 가난한 사람들끼리도 서로 나누는 나눔의 가치 등은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유교와 불교, 도교와 같은 종교들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 역시 우리의 정서에 깔려 있죠. 저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이자 보완으로 ‘생명자본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경제 활동에 생명을 존중하는 정신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죠. 국민 각자가 갖고 있는 생명과 문화의 힘이 잘 발휘되면 2013년에 새로운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만난 사람=허원순 지식사회부장

정리=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 문화발전 위한 정부 역할은

"두레박·부지깽이처럼 돕고 '이끼'의 생명력 불어넣어야"

이어령 이사장은 정부가 국민이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의 임무를 ‘우물에 두레박 놓기’라고 정의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문화 자체는 개개인이 발전시키도록 해야죠. 다만 좋은 문화가 있으면 다른 사람도 동참할 수 있도록 공연장이라든가 전시장 같은 인프라를 구축해 주는 겁니다. 우물에 두레박이 놓여 있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자기 두레박을 가져와야 하죠.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이 이사장은 이어 정부가 해야 할 역할로 ‘부지깽이’와 ‘바위의 이끼’를 제시했다.

“창조의 장작불이 타오르려면 우선 장작이 있어야겠지만 그것을 도와주는 부지깽이도 있어야 합니다. 장작이 창의적인 개인이라면 정부는 장작이 잘 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지깽이가 되면 됩니다. 정부가 창조적일 필요는 없어요. 또 바위는 무생물이지만 이끼라는 생명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죠. 정치와 경제가 바위라면 문화는 이끼입니다. 이끼가 바위를 덮듯 정치와 경제에 문화를 더해 생명을 불어넣어 줘야 합니다.”

■ 이어령 이사장은

문학·언론·학계 활약한 '창조자'…초대 문화부장관 지내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은 문학평론가에서 언론인, 교수, 그리고 문화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한 ‘창조자’다. 충남 아산 출신으로 부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국문과 학사와 석사,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등단했지만 희곡 소설 수필 등 거의 모든 영역을 섭렵했다. 그의 글은 평범한 사실을 뒤집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학 외의 영역까지 넘나드는 그의 행적을 보면 ‘창조자’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1972년에는 ‘문학사상’을 창간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잡지로 키워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폐회식을 세계적인 문화 이벤트로 만든 문화 기획자로 활동했다. 전 세계를 주목시킨 ‘굴렁쇠 굴리기 이벤트’ 역시 그에게서 나왔다.

1990년 처음 문화부가 생겼을 때 초대 장관을 맡아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