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초기 미국에서 ‘강도귀족(robber baron)’이라 불리던 이들은 애꾸눈 잭 같은 강도들이 아니라, 재산을 크게 일군 산업자본가들이었다. 카네기, 밴더빌트, 멜론, 듀크, 모건, 록펠러같이 오늘날 존경받고 있는 유명인사들이 줄줄이 망라돼 있다. 이런 고약한 이름은 단지 이들이 가지고 있던 부와 권력에 대한 질시 때문만은 아니었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경제민주화’의 바람이 재벌과 그 총수들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는 현실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두드러지게 큰 존재는 남의 사랑을 받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재벌개혁의 당위성은 국내에서 이미 충분한 공감을 사고 있다. 국가 경제가 소수의 재벌그룹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경제구조도 걱정이고, 총수들의 독선을 막기 어려운 지배구조도 문제다. 경제구조의 왜곡을 시정하고 공정한 거래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한 재벌개혁이 불가피하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개혁의 논리에는 재벌체제와 그 총수들에 대한 혐오감정이 적잖이 섞여 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재벌 총수에 대한 미움은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짝을 이룬다. 강자에 대한 거부감은 식민지배와 독재정치에 항거해온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에 맥이 닿아 있고, 약자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은 민족 특유의 다정함에 부합한다. 전자의 정당함을 비호하는 일은 아부로, 그리고 후자의 불법을 비판하는 일은 모욕이고 비열한 행위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강자와 약자, 미운 놈과 고운 놈으로 꼬리표를 붙여 편견으로 대해서는 사회적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 이름표보다는 행위로 판단해야 한다. 특히 여론선도자들이 이들의 행위를 보다 합리적이고 균형된 시각으로 보고, 객관적으로 공평하게 판단해, 용기 있게 소신을 밝히는 노력이 있어야 되겠다.

기업집단을 이끄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논리와 설득뿐만 아니라 상당한 배짱과 소신이 있어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권위 없이는 될 수 없다. 창업세대에서 후세로 이어지면서 많은 총수들이 실패했다. 경영능력이 탁월한 소수만이 살아남았고, 그 중 극히 소수가 글로벌기업으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어떤 이는 불가능해 보이던 글로벌 최상위 그룹에 당당히 올라섰고, 어떤 이는 모두 외면하던 적자기업을 끈질긴 집념으로 인수해 큰 이익을 내는 주력기업으로 일으켜 세웠다.

이들은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기를 주저하거나, 먼지를 턴 다음에야 갓을 쓰는 사람들은 아니다. 오히려 혼탁한 물을 휘젓기도 하고, 창랑의 흐린 물에 발을 씻는 그런 사람들이다. 좌고우면하기보다는 무모할 만큼의 용기와 과단성, 그리고 사업에 대한 통찰력과 도전정신으로 무한경쟁과 글로벌 위기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다.

이런 특성이 코닥, 소니, 노키아 등 한때 시장을 석권했던 무수히 많은 거대기업들이 실로 하루아침에 정크로 몰락하는 냉엄한 글로벌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고경영자의 자질이다. 많은 학자들이 오늘날 한국 기업의 성공 비결을 여기에서 찾고 있다.

반면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여러 재벌총수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유감스럽게도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탐욕스러운 행위와 경영적 판단의 결과를 구분하는 법적 기준이 없어, 행위보다는 이름표에 따라 판결이 이뤄지는 경우도 많은 듯싶다. 이들의 책임경영을 보장해주기 위한 법적 장치나 사회적 지지가 너무 취약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이 과를 덮을 수는 없다. 기업집단의 경영을 성공시키고 만 개의 중소기업을 협력업체로 키워 국가경제에 이바지 했더라도, 재벌총수는 천려일실, 단 한번의 과실로도 단죄를 받아 마땅하다.

이 글은 단지 이들의 입장을 헤아려 공정한 비판을 청하려는 것이지, 잘못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기업집단 그리고 그 총수들은 높아진 위상만큼이나 짊어질 도덕적 부담도 크다는 사실을, 또 국민들은 높은 여망을 가지고 이를 지켜보고 있음을 단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강도귀족이 어떻게 존경받게 됐는지 미국 사례에서 많은 걸 배워야 할 것이다.

최생림 < 한양대 명예교수·경영학 srchoi@hany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