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유동성자산 범위 확대로 한숨돌려
국내 은행은 대부분 LCR 기준 충족
국제결제은행(BIS) 산하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가 7일 내놓은 단기 유동성 비율(LCR) 규제 수정안은 ‘제 코가 석자’인 유럽 은행들의 사정을 감안한 조치로 해석된다. 하지만 국제 금융규제가 큰 원칙 없이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치면서 선진국과 신흥국 간 형평성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위기시 자금인출 예상액 축소
바젤위원회의 LCR 규제 수정안은 이행시기를 늦추고 LCR 산정 방식을 완화한 것이 골자다. 주요 은행이 LCR 100% 이상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시점이 당초 2015년에서 2019년으로 4년 늦춰졌다. 선진국 은행은 이 기준을 맞추기 힘든 상황이지만 국내 은행은 대부분 충족한 상태다.
바젤Ⅲ 도입에 따라 은행은 금융 위기 상황에서 향후 30일 동안 예상되는 순현금유출액만큼 유동성 높은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 대규모 자금 인출 사태인 ‘뱅크런’에 대비해 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자산을 일정 수준 이상 확보하라는 의미다.
이번에 바젤위원회는 LCR 산정에서 분모에 해당하는 순현금유출액을 구하는 방식을 완화하고 분자인 고(高)유동성자산에 포함되는 상품의 범위를 확대했다. 우선 30일 내 돈이 얼마나 빠져 나갈지를 예상하는 데 쓰는 ‘이탈률(최대인출가정비율)’을 금융상품별로 하향 조정했다. 예컨대 기업 예금에 대한 이탈률을 기존 75%에서 40%로 35%포인트 낮췄다. 신현길 한국은행 금융규제팀 과장은 “은행은 그 금액만큼 유동성자산을 덜 쌓아도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젤위원회는 유동성 높은 자산으로 인정해 주는 범위도 확대했다. 기존 현금, 국공채 AA급 이상 회사채에다 이번에는 BBB-~A+급 회사채와 주식, AA급 이상 주택담보대출유동화증권(RMBS)까지 추가했다. 또 위기 상황에서 은행이 현금 확보를 위해 고유동성자산을 팔아 일시적으로 LCR이 100%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유럽 은행 불만 수용한 수정안
바젤위원회가 LCR 관련 규제를 완화한 것은 유럽 은행권의 불만에 따른 조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고유동성 자산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유로존 은행이 숨통을 틔게 됐다”고 분석했다. 세계 은행들은 2015년까지 LCR을 100%로 맞추라는 바젤위원회의 방침에 강력 반발해왔다. LCR을 현금 및 국채, 우량 회사채로만 채우려면 대출 사업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게 이유였다. 영국 등 유럽 주요 은행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고난도 구조조정을 거친 데다 최근 유럽 재정 위기로 자산건전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최근 3개월간 금융정책과 관련한 국제 원칙이 세 차례나 수정되자 국제통화기금(IMF)과 바젤위원회 등 국제 금융기구의 이중 잣대도 이슈로 떠올랐다. 모두 유럽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부분이다.
지난해 10월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남유럽 재정위기 국가에 지나친 재정긴축을 피할 것을 조언했다. 지난달에도 IMF는 국제 간 자유로운 자본 이동을 중요시하던 방침을 접고 “필요한 경우 개별 국가가 자본 이동을 관리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 한 전문가는 “신흥국 경제 위기 때는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이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자 규제를 풀어 해결하려 한다”고 꼬집었다.
■ 단기유동성비율(LCR)
liquidity coverage ratio. 국제결제은행(BIS) 산하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가 만든 지표. 은행이 30일간 심각한 유동성 악화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현금, 국채 등 유동성 높은 자산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서정환/김보라/노경목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