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영국 BBC의 자동차 리뷰 프로그램 ‘톱기어(Top Gear)’는 한 자동차업체의 신차에 대해 “싸구려 점심값만도 못한 차”라고 혹평했다. 현대자동차의 엑센트를 놓고 한 얘기였다. ‘자동차 본고장’ 유럽의 눈에 비친 당시 현대차의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12년, 현대차의 위상은 180도 달라졌다. 2000년 초반까지 세계 무대에서 ‘싸구려 차’ 대접을 받던 것과 달리 세계 자동차 시장의 ‘신흥 강자’로 인정받는다. 불황 속에서도 판매량을 급격히 늘려가는 현대차에 놀란 프랑스 정부가 유럽위원회에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긴급 수입제한 조치를 요청했다가 거부당하기도 했다.

거의 ‘환골탈태(換骨奪胎)’급 변신이다. 현대차가 지난해 전 세계 시장에서 판 자동차만 450만대에 육박한다. 8년 전인 2004년 판매량(209만2000대)의 두 배가 넘는다. 미국 등 주요 시장 조사업체들이 매기는 품질 평가에서도 매년 ‘톱10’ 안에 든다. 기아차까지 포함한 현대차그룹의 작년 전체 판매량은 712만대. GM·도요타·르노닛산·폭스바겐에 이어 세계 5위다.

현대차는 올해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기아차를 포함, 세계 시장 판매량 목표를 741만대로 잡았다. 글로벌 경기침체에도 작년보다 4% 이상 판매량을 늘리고, 이에 더해 고가 브랜드로 자리매김한다는 전략이다.

○‘불황이 기회’… 현대차, 글로벌 시장서 웃었다

지난해 세계 자동차 업계는 불황을 겪었다. 유럽 등 세계 경기침체 여파로 자동차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현대차가 맞닥뜨린 상황은 더 심각했다. 우선 강력한 경쟁 상대인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에선 연비 과장 논란이란 대형 악재를 맞았고, 내수 시장에선 수입차의 공세에 시달렸다. 파업도 겪었다. 시장에선 현대차가 연초에 정한 판매 목표치 700만대(기아차 포함) 달성도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예측은 빗나갔다. 현대차의 지난해 전 세계 판매량은 440만5000대. 2011년에 비해 11.1% 늘었다. 2008년 판매량(278만2000대)과 비교하면 5년 새 60%가량 판매량이 증가했다. 기아차를 합한 그룹 전체 판매량은 712만대로 당초 목표치(700만대)를 10만여대 초과 달성했다. 2010년 이후 3년째 세계 5위 자리를 지켰다.

불황과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 현대차의 경쟁력 비결은 뭘까. 현대차 관계자는 “불황기에 해외 공장을 증설하는 역(逆)발상 경영과 선진국 시장에서 뛰어난 품질과 브랜드 인지도를 바탕으로 목표 이상의 판매량을 달성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중국 등 신흥시장 공략에 힘을 쏟은 것도 주효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중국에 3공장(연산 40만대)을 지어 기존 1·2공장과 합쳐 연 100만대 생산 체제를 갖췄다. 중국 시장의 성장세가 과거만 못해도 여전히 높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떠오르는 시장인 브라질에 새 공장(연산 15만대)을 준공, 시장을 넓혔다. 브라질은 2010년 331만여대의 자동차 수요(판매량)로 독일을 제치고 세계 4위의 시장이 됐다. 2015년 자동차 수요가 500만대로 늘어 일본을 제치고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위로 올라설 것으로 전망된다.

○‘양(量)적 성장+품질 승부수’ 주효

‘불황기 투자’라는 역발상이 중국 등 신흥시장에서 수익성을 확보하는 발판이라면, 품질은 선진국 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현대차는 2000년 정몽구 회장이 ‘품질경영’을 선언한 이후 생산, 영업, 애프터서비스(AS), 디자인 등 모든 영역에서 품질 우선 전략을 폈다. ‘저가차 메이커’라는 종전 이미지를 탈피해야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 자동차 시장 조사업체 JD파워의 초기품질지수(소비자 만족도 조사)에서 매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2006년 23개 브랜드 중 1위에 오른 것을 비롯해 2011년과 2012년에도 각각 5위(20개사 비교)와 9위(22개사 비교)로 상위권에 자리잡았다.

브랜드 인지도도 급상승했다. 현대차는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2012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53위를 기록했다. 2011년보다 8계단 오른 순위다. 자동차 부문에선 아우디를 제치고 7위에 올랐다.

품질 우위 전략은 지난해 선진국 시장 판매량 증가로 이어졌다. 현대차(기아차 포함)는 미국 중형차 시장에서 작년 12월 3만2834대를 팔아 1위에 올랐다. 11월에 이어 두 달 연속 1위를 기록한 것. 연간 중형차 판매량도 38만3004대로 도요타(40만4886대)에 이어 2위를 달렸다.

유럽에서도 잘 나간다. 작년 10월 유럽 판매량이 전년 대비 10.2% 늘면서 주요 자동차 업체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작년 11월에도 7.1%의 증가율(전년 대비)로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올해 741만대 목표… 질적 성장으로 위기 돌파

현대차는 올해 판매 목표를 741만대(기아차 포함)로 잡았다. 작년보다 4% 이상 늘렸지만, 지난해 말의 잠정 목표치(750만대)보다는 줄어든 규모다. 매년 10%가량 판매량을 높여 잡았던 예년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인 사업 계획이다.

여기엔 작년에 이어 올해 역시 글로벌 경기침체, 내수시장 위축, 엔저(低)에 따른 일본차들과의 경쟁 심화 등 악재가 많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정 회장도 올해 시무식에서 “질적 성장을 통해 내실을 더 강화하고, 미래를 위한 경쟁력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리하게 판매 확대를 추진하기보다는 내실을 다지겠다는 의미다.

현대차는 이에 따라 올해 국내외에서 공장을 신·증설하지 않을 계획이다. 대신 품질 개선과 브랜드 고급화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 ‘제값 받기’ 전략도 꾸준히 추진하기로 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6월 미국 시장에서 신형 그랜저를 선보이면서 기존 제품보다 가격을 최대 25.5%(3만2000~3만6000달러) 높게 책정했다. 품질 경쟁력이 다른 차종에 뒤지지 않는 이상 가격을 제대로 받겠다는 전략이다. 신규 모델도 속속 출시한다. 올해 대형 SUV(프로젝트명 NC), 아반떼 쿠페, 제네시스 후속 모델 등을 잇달아 선보일 예정이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