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정치철학을 담은 책 ‘아름다운 나라로’에 나오는 얘기 한 토막.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A급 전범’이라는 비난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질문에 아베 총리는 이렇게 답했다. “반발심이 생겨 보수·우익이라는 말에 오히려 더 친근감을 느끼게 됐다.”

아베 총리가 극우적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국방 교육 역사문제 등 손을 대는 분야도 다양하다. 최종 목표는 ‘전쟁 포기’를 규정한 이른바 ‘평화헌법’의 개정이다. 분수령은 오는 7월 치러지는 일본 참의원 선거. 중의원에 이어 상원격인 참의원마저 장악하게 되면 아베의 극우정책은 날개를 달게 된다. 벌써부터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은 물론 미국 언론까지 비난 대열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오른쪽으로 기우는 일본

아베는 타고난 극우다. 집안부터 확실한 오른쪽이다. 옛 만주국의 ‘그림자 총리’로 불렸던 외할아버지 기시 전 총리는 일본 극우의 원조다. 기시는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도 평화헌법 개정과 ‘자학적’ 역사관 수정에 매달렸다. 아베는 그런 외할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는다. 작은 외조부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와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외상의 정치색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극우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베 총리는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망언을 일삼았고, 야스쿠니신사도 거침없이 참배했다. 그런 그가 두 번째 일본 총리직에 올랐다. 일본 정치판의 ‘우향우’는 당연한 수순이다.

아베는 내각부터 극우로 꾸몄다. 일본의 주변국 침략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과 관련해 망언을 일삼은 정치가를 대거 포진시켰다. 대표적 인사는 문부과학상에 임명된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의원. 그는 아베 1차 내각의 관방장관이던 2007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종군간호부나 종군기자는 있었지만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며 “위안부가 있었더라도 부모가 딸을 파는 일이 있었을 뿐 일본군이 관여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8월 한국의 독도 지배 강화 실태를 살펴보겠다며 울릉도 방문길에 나섰던 정치인 3명도 모두 요직을 차지했다.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의원과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전 자민당 부간사장은 각각 총무상과 행정개혁담당상에 임명됐고, 사토 마사히사(佐藤正久) 의원은 방위성 정무관(차관급) 자리에 앉았다.

◆드러나는 극우 본색

올해 첫 자민당 전체회의가 열린 지난 7일. 아베는 국가(國歌)인 기미가요를 제창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기미가요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부르던 국가다. 아시아 각국은 이를 전쟁과 침략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폐지됐다가 1999년 다시 일본 국가로 법제화됐지만 국수적인 색채가 짙다는 비판 때문에 공식적 자리에서 단체로 부르는 경우는 드물다. 아베는 이날 당원들과 기미가요를 부르고 난 뒤 “업무 시작 때 제대로 기미가요를 부를 수 있는 정당으로 정권이 바뀌었다”고 뿌듯해했다.

지난달 말엔 과거사와 관련한 새 담화를 만들겠다는 뜻도 밝혔다.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 등 역대 일본 정부의 과거사 반성 담화의 의미를 희석시키겠다는 의도다.

극우적 아베 색깔이 확실하게 드러나도록 정책 조언을 담당할 전문가 조직도 꾸릴 방침이다. 주요 의제는 △외교안보정책을 총리관저가 직접 맡기 위한 일본판 국가안보회의(NSC) 설치 △집단적 자위권 행사 △과거사 관련 새로운 담화 구상 등이다.

아베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양적·질적으로 강한 자위대’를 위한 수순도 착착 밟아나가고 있다. 방위청은 지난 10년간 계속 줄어온 방위비 예산을 올해 11년 만에 2%(1000억엔)가량 증액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특별법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자위대의 해외파병도 상시화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만들 계획이다.

‘아베식 교육 재생’에도 시동이 걸렸다. 각료와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총리 직속의 ‘교육재생실행본부(가칭)’를 이달 중 설립, 역사를 서술할 때 이웃나라를 배려하도록 한 ‘근린제국 조항’의 수정 등 교과서 검정제도의 근본적 개혁방안을 논의할 방침이다.

◆참의원 선거가 관건

아베의 궁극적 목표는 개헌이다. ‘군대보유와 전쟁 포기’를 규정한 헌법 제9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일본의 헌법 개정 절차는 매우 까다롭다.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만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고, 국민투표에서 유효투표의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헌법 개정이 가능하다.

중의원만 놓고 보면 개정안 발의는 어렵지 않다. 이번 총선에서 자민당은 480석 가운데 294석을 얻었다.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일본유신회(54석)를 합하면 중의원의 3분의 2를 훌쩍 넘는다. 문제는 참의원이다. 자민당의 참의원 의석은 83석으로 민주당(87석)보다 4석 적다. 전체 의석(242석)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우군인 일본유신회는 아예 의석이 없다.

자민당의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우선 개헌안 발의 요건(헌법 96조)을 완화하는 개헌을 추진하는 것. 이게 여의치 않으면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 평화헌법 개헌 정족수를 스스로 채운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헌법 개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자민당의 연립파트너인 공명당이 헌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는 데다, 국민 여론도 섣불리 예단하긴 힘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시선도 따갑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아베 총리의 수치스러운 충동이 북한 핵 문제 등에 대한 지역 내 협력을 위협할 수 있다”며 “그런 수정주의는 장기적인 경제침체 극복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일본 자신을 곤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아베 정권은 급진적인 국수주의 내각”이라며 “무서울 만큼 우익 성향인 내각은 아시아 지역에 나쁜 징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